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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SU Oct 10. 2020

홍상수 감독의 신작 개봉, <도망친 여자>

안녕하세요. 에디터 SU입니다.


이번 주는 어떤 영화와 함께하셨나요? 저는 정말 오랜만에 독립영화관을 찾았습니다. 극장 스크린으로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본 것은 처음이었어요. 그의 새로운 영화가 올해 초 해외에서 열렬한 환호를 이끌어 한국 영화계에 전에 없던 쾌거를 이뤘었는데 국내에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아쉽습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은 그동안 독보적인 스타일을 고수해온 터라 하나의 장르로 분류될 지경이지만 이번 영화는 그에 비해 홍상수만의 영화적인 요소들을 많이 내려놓는 식으로 변주되었다고 평해집니다. 그럼에도 미니멀하게 갖춰진 공간을 밋밋하면서도 낯선 기법으로 줌인하는 카메라는 여전히 그의 영화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롭게 여겨지는 점은 배우 김민희, 김새벽, 서영화를 비롯해 잔잔한 분위기 속 서늘함이 느껴지는 배우들이 모여 <도망친 여자>를 연기한다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무드를 가진 얼굴들이 한 영화에 등장함은 너무 기쁜 일입니다. 영화의 모든 요소들이 <도망친 여자>가 하나의 톤으로 정돈되도록 돕습니다. 차분하고 우아한 분위기의 서늘한 색감이 영화를 통일합니다. 좁은 프레임 내에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세계의 다양한 가능성을 내포하는데요. <도망친 여자> 역시 일반화가 불가능한 미장센들의 연속입니다.

홍상수 감독은 영화 속 '도망친 여자'가 누구냐는 물음에 그걸 자신도 정하지 못하고 영화를 찍으러 갔다고 대답했는데요. 평소 그는 찍고 싶은 소재만을 가지고 촬영장을 꾸리는 걸로 유명합니다. 별 준비 없이 맞닥뜨리며 연출하는 영화 각본의 완성도는 역시 홍상수 감독의 능력에 감탄하게 만듭니다. 유영하듯 떠도는 장면과 대사들을 어떻게 묶어 분석해야 할지 어렵고 홍상수 감독 또한 다른 이들이 자신의 영화에 말을 덧붙이는 게 싫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관객으로서 그의 영화를 해석하고 싶다는 마음에 며칠 동안이나 <도망친 여자>를 곱씹으면서 지냈습니다.

영화는 감희(김민희)의 '떠남'으로 시작됩니다. 그의 남편이 출장을 간 사이 친구들을 만나러 갑니다. 감희는 영순(서영화)과 수영(송선미)의 집을 차례로 방문합니다. 영화 초반, 감희가 오랜만에 지인을 만나 대화를 나눌 때 마치 그녀에게 일정한 역할이 부여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대부분 지인에게 질문을 던지고 침착하게 얘기를 들어주며 좋은 말로 위로하거나 북돋아줍니다. 때문에 감희의 속내는 도통 알기가 어렵습니다. 감희를 주체로 한 공간의 이동 또한 매우 제한적입니다. 지인의 집에서 그녀가 방과 방 사이를 이동하는 모습은 영화에서 배제되고 관객들은 감희가 테라스에서 저녁을 먹고 부엌에서 사과를 먹는다는 정도만 알 수 있습니다.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영화 속의 인물인 감희마저 공간 이동에 제약이 있음을 몇몇 장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죠. 자다 깨서 영순에게 3층에 왜 못 올라가게 막느냐고 질문하는 장면, 수영의 부엌에서 음식이 타고 있을 때 어딘가에서 괜찮냐고 물어볼 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장면에서 문득 그녀의 존재에 대한 기묘함이 느껴집니다. 집 밖에 나간 영순과 수영을 소리 없는 인터폰 화면으로 가만히 지켜보는 모습은 이 영화 속 감희의 형상입니다.

감희는 예정되었던 약속이 끝나고 우연히 한 사람을 또 만나게 됩니다. 대뜸 만나자마자 미안했다고 사과를 하는 우진(김새벽)이 일하는 영화관에서 말이죠. 감희는 영화를 보고 나와 우진의 사무실에 들어가 또 대화를 나눕니다. 그들은 우진의 남편이자 감희의 전 애인인 정 선생이 인터뷰에서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진은 남편이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건 진심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과 같다며 그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내비칩니다. 감희는 영화관을 나와 담배를 피우던 정 선생과 마주치는데 그곳에서 그와 은근히 다투던 중 얘기하죠. '선생님 말을 좀 그만하시는 게 좋겠어요.' 그 씬에서 우리는 감희의 형상을 고쳐보게 됩니다.

그녀는 세 명의 지인을 만날 때마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죠. '우리는 매일 붙어있어.' 어떤 맥락에서든 대화마다 남편과 자신은 사랑하니까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다는 말을 합니다. 이는 이 영화가 내어주는 감희에 대해 유일하게 알 수 있는 정보이기도 하죠. 우진과 정 선생을 만나는 제3막에서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사람은 아무 진심이 없다는 얘기는 정 선생뿐만이 아닌 감희에게도 적용되는 내용임을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정 선생에 대한 혐오의 감정은 감희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정 선생과 다툰 뒤 다른 문으로 영화관을 나왔던 감희는 다시 방향을 틀어 영화관으로 들어갑니다. 아까 그녀가 봤던 흑백 영화가 색이 입혀진 채로 상영되고 있습니다. 감희가 상대에게 쓴소리를 던지고 주체적으로 가던 방향을 트는 모습은 영화에서 제게 주어진 역할을 거부하고 공간의 제약을 이겨내는 미장센입니다. 3장이 끝난 후 감희는 그저 기묘한 형상이 아닌 역동성을 얻은 인물로 성장합니다. 그녀가 무엇으로부터 도망쳤는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도망친 여자임은 분명합니다. 플롯의 구성이 참 흥미롭지 않은가요? 홍상수 감독의 전작들이 더욱 궁금해집니다.

여자들은 늘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거나 도망치는 중이라고 합니다. '도망치다'라는 단어를 그렇게 좋아하진 않으나 이 영화에서 탐구하고 형성하는 '도망'의 개념은 마음에 들었어요. 저도 언젠간 도망가고 싶네요. 여러분에게도 항상 안전한 도피처가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오늘도 영화와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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