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아이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안녕하세요, 에디터 SU입니다.
여성에게 특혜를 달라는 게 아닙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하려는 부탁은 우리 목을 밟은 발을 치워달라는 것뿐입니다.
9월 18일,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이하 RBG 대법관) 미국 연방 대법원 대법관이 췌장암 투병 끝에 별세했습니다. 아주 긴 여정 동안 열심히 인권 수호를 위해 싸워 온 영웅을 전 세계적으로 추모하는 분위기인데요. 그의 젊은 변호인 시절을 다룬 전기 영화 <On The Basis Of Sex>와, 생애 전반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에 관하여 이야기하겠습니다.
‘세상을 바꾼 변호인’이라는 한국어 제목이 붙은 영화 <On The Basis Of Sex>는 RBG 대법관이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할 때부터 럿거스대 교수가 되고, 변호사로서 성차별 소송들을 처음 맡기 시작할 때를 그리고 있습니다. 저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먼저 보고 나서 이 영화를 보았는데요, RBG 대법관이 실제로 했던 말들과 겪었던 일들이 세세하게 들어가 있어서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하버드 로스쿨 학장이 1학년 여학생 9명에게 ‘남학생들의 자리를 차지하고 이곳에 입학한 이유가 뭐냐’고 무례하게 물어봤던 것, 소크라테스식 수업에서 남성 교수가 여학생에겐 질문하지 않던 것, 17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가 ‘쓸데없는 분노 같은 감정에 휩쓸리지 말라’고 당부하셨던 것이 그렇습니다.
하버드 입학 당시 루스는 14개월 아기의 엄마였습니다. 남편은 코넬대학교 학부생 때 만난 마틴 긴즈버그로, 하버드 로스쿨의 2학년생이었습니다. 마틴은 로스쿨 3학년 때 악성 암에 걸렸는데, 화학요법이 없던 때라 방사선 치료만 받았습니다. 방사선을 쬐고 나면 거의 자정이 됐습니다. 루스는 마틴의 친구들이 전해준 수업 필기를 타이핑하고, 딸 제인도 혼자 돌보면서 공부했습니다. 시간을 쪼개면서 일하는 모습은 학창 시절이나 대법관이 되고 나서나 달라진 것이 없네요. 다행히 마틴은 건강해졌지만, 루스는 몹시 지쳤습니다.
마틴이 먼저 로스쿨을 졸업하고 뉴욕의 로펌에 들어갔습니다. 루스가 2학년 과정을 마칠 때였죠. 마틴의 병 때문에 따로 살 수는 없었으니, 루스에게는 컬럼비아 로스쿨 전학과 뉴욕으로의 이사가 최선이었습니다. 하버드 로스쿨 학장은 루스가 로스쿨에서 가장 중요한 1학년을 하버드에서 보냈고, 2년이나 로스쿨에 재학했음에도 불구하고 학위를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루스는 컬럼비아 로스쿨을 59년도에 졸업했습니다. 뉴욕시에 여성 변호사를 쓰려는 로펌은 전혀 없었고, 이것이 이런 불의에 맞서기로 한 RBG 대법관 일생일대의 업적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당시 여성은 권리와 지위에서 법적 차별을 받았습니다. 연방법과 주법 중 수백수천 항목에 성별을 근거로 한 차별이 존재했는데요. 당시 법에 남편은 가정 공동체의 주체이자 주인이고, 가족의 주거지는 남편이 선택하는 것이며 여성은 남편을 따를 의무가 있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1970년 실정법에 적힌 대로라면, 임신한 여성을 합법적으로 해고하는 것이 가능했고, 은행은 여성과의 거래 시 남편 공동 서명을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또, 12개 주에서 남편은 아내 성폭행으로 기소될 수 없었습니다. 미국의 일상 곳곳에서 여성은 다르게 취급당했습니다. 이에 여성이 이등 시민이라는 사회적 편견을 거부하는 여성해방운동이 일어났습니다. <On The Basis Of Sex>에서도 제인이 시위하며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루스에게 말하는데요. 루스는 행진과 시위 대신 법적인 기술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1963년에 럿거스대 교수가 되면서부터요.
1960년대 후반, 루스는 학생들의 요구로 ‘여성과 법’ 과목을 개설했습니다. 이맘때 성차별 소송을 맡으며 소송 사냥꾼으로서의 첫발을 내딛습니다. 당시 변호사로서 그의 철칙은 법을 개선할 소송을 맡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민권 변호사 서굿 마셜의 행보와 비슷한데요, 전기 영화에서도 서굿 마셜의 이름이 언급됩니다. 마셜이 설계한 인종 평등 투쟁은 평등한 법적 보호라는 헌법 조항에 근거를 두었는데요, RBG 대법관은 같은 논리로 여성을 보호하려 했습니다.
<On The Basis Of Sex>에서는 한 사건을 중심적으로 다루는데요. 결혼하지 않고 혼자 노모를 모시는 남성이 정당한 보육비를 받지 못하여 항소했고, 루스는 이 소송을 맡기로 합니다. 남자가 차별받는 사례를 통해서 성차별의 심각성을 알리려는 의도였지요. 영화이다 보니 일부 각색된 부분이 있는데요, 실제 RBG 대법관이 변호한 사건(1975년 와인버거 대 와이젠펠드) 은, 아내가 사망한 직후 혼자 아들을 돌보는 남성의 사례였습니다. 원고는 지역 사회보장국에 가서 보육 수당을 신청했습니다. 편부라서 가능할 줄 알았지만, 지급 대상은 어머니뿐이었고 아버지는 불가했습니다. 판결 결과는 아주 좋았습니다. 만장일치로 소송에 승리했고, 성차별이 모든 국민에게 해가 된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보여주었습니다. RBG 대법관은 10년 뒤를 보고 일관된 소송을 맡았고, 점진적으로 성평등에 다가서려 한 것입니다.
전기 영화는 여기에서 끝이 나지만, RBG 대법관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1980년 항소법원 판사로 임명되었고, 1993년에 미연방 대법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권 신장에 매진하였습니다. 남자 동료들이 받는 수당을 여자라는 이유로 못 받은 공군 소위를 위해 변론했고, 버지니아 국사 대학에 여자 생도가 입학할 수 있도록 하였고, 배심원 성차별에 도전하며 법이라는 분야에 새 지평을 열었습니다. 또한, 장애인, 성소수자 등 약자들을 위해서도 노력을 다했습니다.
법에 관한 한은 적극적으로 하려 했어요. 제게 법은 일생을 바칠… 사랑이니까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를 통해 학생, 교수, 변호사, 대법관으로서의 모습뿐만 아니라, 그가 어린 시절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오페라를 좋아하고 남편 마틴과 서로 존중하며 사랑했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진보 진영의 대법관이었지만 보수 성향의 대법관들과도 공감대를 이루던 것도 의외의 모습이었죠. 정의롭지 못한 판결문에 반대 의견을 거리낌 없이 내는 모습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일례로 2006년 레드베터 대 굿이어 소송에서, 여성 급여가 40프로나 적었음에도 소송 시기가 지났다는 대법원의 판결문에 RBG 대법관은 반대 의견을 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법원은 몰이해하거나 무관심한 모양이다. 여성 직원에게 교활한 임금 차별이 자행됐으나 법원은 고용 형태를 규율하는 법률과 사업장의 현실을 외면했다.
남자 동료의 급여 명세를 바로 알 수 없다. 오랜 시간 근무 후 차별을 의심할 근거가 생기는 것이다.
젊은 세대는 새로운 영웅의 등장에 열광했고, ‘루스(Ruth) 없이는 진실(Truth)도 없다’라는 문구와 ‘노터리어스 RBG’ 캐릭터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는 래퍼 ‘노터리어스 BIG’의 랩 네임을 따서 지어진 별명인데, RBG 대법관과 영화 속 히어로의 합성 사진이 인터넷에 ‘노터리어스 RBG’ 해시태그를 타고 퍼졌고, 그의 얼굴이 새겨진 머그컵, 티셔츠, 심지어 문신까지 등장했습니다. 그가 수십 년간 해 온 일을 알게 되면서, 권력에 단호하게 진실을 외쳐 온 삶에 사람들은 감탄했습니다. 하버드 로스쿨의 여성과 남성 성비가 RBG 대법관의 손녀 학번에서, 200년 만에 반반이 되기까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의 무수한 지지와 반대가 밑거름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되새겨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