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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당 Jan 04. 2024

사랑과 증오의 양가감정

#치앙마이 일년살기

박우란 상담사님의 애도의 기술을 읽고 쓰는 글


이 책의 '매일 미워하고 매일 사랑하다' 편에는 아버지에 대한 원한으로 가득 찬 '윤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윤지의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음에도 상담시간에 윤지가 아버지를 언급할 때면 비난과 힐난이 이어졌다.


윤지는 어린 시절 집을 나간 엄마를 그리워했고 엄마의 부재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엄마를 '좋은 사람' 아빠를 '나쁜 사람'이라고 규정해 둔 세상 속에 살았다. 하지만 윤지의 아버지는 윤지에게 화도 내고 무뚝뚝한 불친절한 아버지였음에도 집을 나간 엄마 대신 윤지를 책임진 사람이었고 윤지도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윤지는 그런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증오'라는 방식으로 표현했고 상담사는 책에서 이것을 두고 '증오라는 환유의 방식으로 아버지를 붙들고 놓아주지 못한다'라고 표현했다.


이 편은 설명이 너무 축약적이고 다소 불친절해서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이분법적인 틀에 누군가를 가두어두고 증오라는 감정을 통해 그를 놓지 못하고 고통을 받는다는 점이 나의 상황과도 맞는 부분이 있어서 누군가에게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해당 편에는 정신분석가 맹정현 님의 [멜랑꼴리의 검은마술]에 나오는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사랑과 증오의 양가감정으로 인해, 대상을 증오하는 것이 곧 대상을 부여잡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대상에 대한 증오는 사라진 대상을 부여잡기 위해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분법적 사고방식, 사랑과 증오의 양가감정.


아빠에 대한 내 감정이 정확히 그러했다. 아빠는 나쁜 사람.


어려서 아빠는 나에게 늘 '여자는 출가외인'이라는 소리를 하며 아들과 차별을 하였고 아빠에게 반대의견을 말할 때는 '불효'라고 하면서 손에 잡히는 것을 닥치는 대로 들고 폭력을 행사했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나, 집에 혼자 있으면서 아빠랑 대화를 하다가 또 아빠의 말에 말대꾸를 했나 보다. (아빠는 자신의 의견에 토를 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분노한 아빠에게 너무 심하게 맞다가(손에 들렸던 게 야구배트인지 혁대인지 헷갈린다) 방으로 도망가니 아빠가 쌍욕을 하면서 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아빠의 발 에 바짝 엎드려서 울면서 잘못했으니 살려달라고 빌었다. 엎드려서 올려다 본 아빠의 표정은 당장 살인이라도 저지를 표정이었고 나는 이 표정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참고로 아빠는 건설 관련 일을 했고 피지컬이 매우 좋은 사람이었다. 나 뿐만 아니라 아빠가 젊은 시절 함께 살았던 자신의 조카들에게도 폭력을 휘둘러서 나중에 조카들이 그 이야기를 꺼내며 오열한 적도 있다고 한다. 


외할머니를 모시고 산책을 다녀왔다고 말하니 아빠가 나에게 건넨 말은 '미친년'이었다. 어느날은 TV로 아구를 보면서 선수가 안타를 쳐서 환호했는데, 방에 있던 아빠가 문을 벌컥 열고 나와서 시끄럽다며 쌍욕을 퍼부운 일도 있다. 시무룩해져서 방으로 들어가니 아빠는 내가 보던 TV로 다른 채널을 보면서 시끄럽게 웃던 기억이 나기도 한다. 


집에는 엄마와 나, 두 명의 여성이 있었고 가끔 생리 흔적이 화장실에 남기도 했다. 아빠는 못 볼 것을 봤다는 표정으로 집요하게 '더럽다'라고 욕을 했고 브래지어를 두고는 '젖가리개'라고 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게 치우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했다.


아빠는 여자를 싫어하는 걸까. 여자인 것은 잘못된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10대 청소년기를 보냈다.


남동생이 결혼하여 집에 며느리가 들어오니 아들을 낳으라 압박했고(아들을 낳으면 집을 사주겠다) 며느리에게 '(아들을 낳기 위해) 성관계는 얼마나 갖느냐'라고 묻는 것을 보고 아빠에 인간적인 기대는 차갑게 식어갔다.


확실한 건 아빠는 나르시시스트의 면모를 갖고 있다는 것이었고 자신의 행동을 '네가 잘못했기 때문'이라며 정당화했다. 생일 때는 '내 덕에 태어났으니 감사해라'라고 하며 늘 '너는 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와 같은 말을 달고 다녔다.


그래, 책에 나온 윤지처럼 나도 아빠에 대한 비난과 힐난을 하고자 한다면 몇 박 며칠을 계속할 수 있다.


아빠의 긍정적인 면을 인정하기에는 내 고통이 어떤 식으로든 애도되지 않았고 아주 오랜 세월을 아빠에 대한 분노로 살았다. 그렇게 거의 20년 즈음이 지나고 30대 중반이 되자 더 이상 아빠로 인한 생각에 고통까지는 받지 않는다. 독립을 한 나에 대한 엄마의 집착이 시작되면서 나의 이분법 속 분노의 대상은 자연스럽게 아빠에서 엄마로 넘어갔다.


책에 따르면 그 오랜 세월 동안 아빠를 증오한 것은 아빠를 놓지 못한 것인데 나는 왜 그랬던 걸까. 나는 아빠에게 사랑을 받고 싶었던 걸까. 지금은 '아빠 같은 사람의 사랑 따위는 바라지 않아'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빠에게 칭찬받고 싶어서 공부를 열심히 했고 내가 다이어트에 성공했을 때 아빠가 해준 칭찬을 기억해서 지금도 다이어트에 집착한다. 아빠가 나에게 한 모든 말을 스펀지처럼 흡수했고 아빠가 원하는 모습의 여성이 아닌 나 자신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 아빠가 싫지만 지금의 내 모습은 다 아빠가 만들었다.


아빠의 사랑을 아무리 듬뿍 받아도 모자랐을 유년시절은 빠르게 지나갔고, 아빠와의 관계는 나의 인간관계 전체로 확장되어 큰 영향을 끼쳤다.


책에서는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한 친절한 안내는 하지 않는다. 이분법에서 벗어나서 윤지가, 그리고 내가 결국은 아빠를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되는 걸까.


해당 편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현재를 바로 보고 살아가려면, 차근차근 과거의 감정과 서사를 살피고 원인을 끼워 맞추는 것보다 현상이라는 표면 위에 드러난 방향과 구조를 읽어야 합니다.  


그걸 어떻게 하면 되는 걸까.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라는 이분법적 구조에서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아빠는 내가 증오할만한 이유가 충분한 사람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증오는 사랑, 그리움의 감정과 엮여있었고 나는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 채 너무 오랜 시간을 고통스러워했다. 다른 인간관계에서도 나는 사랑과 증오의 감정을 헷갈리고 내가 정한 틀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나에게 잘못된 행동을 해도 증오하면서도 놓지 못한다.


진짜 엉망진창이다. 그래도 계속 방법을 찾아보는 수 밖에는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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