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보는 정신과 의사의 유튜브 채널에서 '유료광고'임을 표기하고 추천해 준 책을 방금 다 읽은 참이다. 현직의사가 쓴 책으로 작가는 2형 양극성 장애라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현직 의사인 관계로 작가 이름으로는 '경조울'이라는 가명을 썼다.
2형 양극성 장애는 조증과 우울증이 번갈아 나타나는 정신질환이라고 한다. 흔히 말하는 '조울증'이다. 1형 양극성 장애는 조증이 두드러지고 2형 양극성 장애는 우울증을 보이면서 경조증(가벼운 조증)이 함께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작가는 23살에 2형 양극성 장애를 진단받고 현재는 30대 초중반의 나이인 것으로 보인다. 건강한 몸상태로도 견디기 힘든 의과대학-인턴-전공의 과정을 2형 양극성 장애와 함께 보냈다.
나는 스스로 우울증 증상을 지니고 있음을 인지하며 우울증에 대해서만 생각했었지 조울증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 본 바가 없다. 그래서 뭔가 조울증은 다른 차원의 정신질환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특별하게 다를 것은 없었다.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대해서 나의 신체는 우울증으로, 작가의 신체는 조울증으로 반응을 보인 것이 아닐까 싶다.
야, 너두??
책을 읽으며, 책을 다 읽고 가장 많이 한 생각이다. 작가는 조울증이라고 하였으나 작가의 삶은 나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물론 그녀는 그 어렵다는 의대에 합격하여 의과대학 생활과 인턴 생활을 견디고 실제로 의사 생활을 하고 있는 초엘리트 인재라 나에게는 외계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부모님과의 갈등으로 인한 불안정 애착형성, 자기 파괴적 행위 탐닉(잘못된 연애, 음주, 수면제 오남용, 자살사고) 같은 어려움을 겪고 이것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한 삶의 궤적은 나에게는 엄청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작가는 조울증(2형 양극성 장애)을 진단받은 후 정신분석을 통해 자신의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지 깨닫는 시간을 갖는다. 이것이 병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겠지만 작가는 자신을 다른 형제들과 차별하는 부모(특히 엄마)로 인해 애착 형성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었다.
아니 사람이 살면서 유년시절에 겪은 어려움이 인생 전반에 이렇게까지 큰 영향을 끼쳐야 하는 건가? 가끔 스스로도 짜증이 날 때가 있지만 정말 그런가 보다. 의사라는, 이렇게 똑똑한 전문직 인재까지도 결국은 고통의 이유가 유년시절로 돌아간다.
작가의 어머님은 작가에게 비상식적일 정도로 차별을 가했고 이때 작가가 자신의 어머님에게 느꼈을 차별감, 모멸감은 나에게도 생생히 전달되었다. 그리고 왜 이때의 일이 인생 전반에 영향을 끼쳤는지 나는 너무도 충분히 이해를 한다.
치앙마이에 2주간 다녀갔던 친구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때 친구에게 많이 꺼낸 이야기가 '나의 존재의 이유'라는 말이었다. 작가는 공부를 아무리 잘했어도 다른 형제들에 비해 크나큰 차별을 받았고 그래서 자신의 존재의 가치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었을 것이다. 나는 부모님이 원하는 행동을 해야만 관심을 받았고 그것이 치가 떨릴 만큼 싫었고 지금도 싫다. 당신들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받고 싶었는데 애초에는 딸이어서 사랑을 받지 못했고 이후에는 공부를 잘하거나, 살을 빼거나, 부모님을 정서적으로 살뜰히 보살펴야 사랑을 받았다.
극심한 자존감 부족은 나나 작가 모두를 인간관계를 제대로 맺지 못하고, 알콜 같은 향정신성물질에 탐닉/의지하고, 때때로는 자살을 생각하는 마음의 병으로 이끌었다. 작가는 극심한 불면증으로 수면제를 오남용 했는데 때로는 술과 수면제를 함께 복용했고 지금 살아있는 게 다행으로 보인다. 한국 사회에서 의사가 이런 행동을 했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큰 지탄을 받을 일이기에 익명으로 글을 쓸 수밖에 없었으리라.
*작가 본인도 '낙인'이라는 챕터에서 의사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점 때문에 낙인이 찍힐 것을 두려워하는 내용에 대해 적었다. 개인적으로는 의사가 정신질환을 앓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우울증/불면증/음주/약물 오남용 등으로 인해 상태가 엉망임에도 의사 업무를 보는 것이 문제로 보였다. 작가는 상태가 엉망임에도 업무에는 지장이 없었고 자신의 정신의학과 주치의도 의사 업무에는 지장이 없다고 판단하였다고 하였다. 하지만 정신과 약을 먹으며 관리하는 의사에게 진료받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잠을 못 잤건, 전날 신나게 음주를 했건 몸이 좋지 않은 상태의 의사에게 진료받는 것이 두려운 것이니 이것을 '낙인'이라고 잘못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면 한다. 의사는 다른 직업군과는 너무도 달라서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자의적인 판단을 할 가능성이 높고 이로 인해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이 책의 작가는 스스로 위험성을 판단하고 정신의학과를 찾아서 치료를 받았지만 그렇지 않은 의사들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 정도까지 솔직한 내용을 털어놓은 것에 큰 박수를 보낸다.
익명의 힘을 빌었으나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풀어놓았고 이는 비슷한 고통을 안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위안과 희망을, 그렇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정신질환에 대한 이해도를 크게 높이는 일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책의, 작가의 삶의 결말은 무엇인가?
결말은 없다. 현재 진행형이다. 작가는 자신의 질환에서 '완치'되지 않았고 이 질환으로 인해 고통받지 않을 만큼 '관리'하면서 살아간다. 정기적으로 정신의학과 주치의와 상담하고 올바르게 약물을 복용하고 술을 끊고 자신을 정서적으로 지지해 줄 남편을 만났고 자신에게 정서적으로 해를 끼치는 엄마와 거리를 두고 지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글쓰기가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작가의 이야기는 나와 비슷하지만 다를 것이다.
작가는 '의사'라는 천직 혹은 소명을 찾았고 의사로서 일하는 것에 즐거움과 자부심을 느낀다. 이로 인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도 않을 것이고 자신을 정서적으로 지지하는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일/직업은 한 인간의 자존감 형성에 너무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돈 역시 그러하다. 일의 종류에 관계없이 자신이 자부심을 갖고 할 수 있는 일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서 어느 정도는 안정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경제적으로 궁핍해진 상태에서는 정신질환을 관리하고 이겨낼 가능성이 낮아진다.
나는 결혼을 통한 정서적 안정을 꾀할 생각은 없고 그 이외의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아직 소명이라고 부를만한 일은 찾지 못했고 술을 끊고, 운동하고, 글을 쓰는 선에서의 관리를 하고 있다.
작가의 솔직한 고백을 친구 삼아 나는 또 나만의 길을 찾아가야지, 그런 생각이다.
나는 아마도 유년시절의 부모님과의 불안정 애착 형성으로 인한 극심한 자존감 부족에 시달리며 우울감, 알코올 의존증상, 폭식증, 1회성의 공황발작을 경험한 만 37세의 여성이고 오늘은 금주한 지 140일 차다. 우울감이 나 자신이 되지 않도록, 우울감에 먹히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치앙마이 1월 날씨는 눈이 부실 지경인데 이것도 이제 한 달 남았다. 곧 미세먼지 시즌이 시작된다. 날씨가 우울감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지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