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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당 Feb 03. 2024

태국의 벽간소음

#치앙마이 일년살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오른손 아랫부분에 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새벽에 벽간소음을 참지 못하고 벽을 너무 세게 두들겨서 생긴 모양이다. 원래는 벽이 얼마나 단단한지 만져만 보려고 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벽을 힘차게 두드린 후였다. 벽을 두드리자마자 옆방 커플의 소음은 단박에 멈추고 그제야 나는 잠에 들 수 있었다.


태국은 기본적으로 어느 곳이건 방음이 잘 안 된다. 호텔이건 지금 내가 묵고 있는 콘도 형태의 장기 거주 시설이건 상황은 비슷하다. 아마 기후나 문화적인 이유가 있을 텐데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층간소음보다는 벽간소음이라고 해야 할까, 옆 방의 소리가 크게 타고 들어오는 편이다. 특히 야간에 조금만 힘을 주어 말하면 소리가 크게 울려서 벽을 타고 전달이 된다. 대화 내용까지 선명하게 들린다.


내가 머무는 숙소는 주로 한 달씩 머무는 손님이 대부분인 곳인데 나는 벌써 다섯 달째 머무는 중이다. 여러 이웃이 내 옆 방을 거쳐갔다. 다행히 다들 조용한 것을 선호하는 분들이셨는지 지금까지 별다른 문제없이 머물 수 있었는데 이번달 들어서 그 행운은 막을 내렸다. 말과 행동에 거침이 없는 한국인 커플이 옆 방에 입실했다.


원래 방음이 잘 되지 않는 곳이니 어지간한 소음은 귀마개를 끼고 참는 편인데 아뿔싸, 이 커플은 그렇게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닌 것 같았다. 자정이 넘어 술을 마시고 취해서 싸우는 소리가 벽을 타고 울렸다. 여성은 혀가 꼬인 발음으로 '우웨웨웨'하며 울부짖었고 남성도 소리를 질렀다. 이야, 지옥이 있다면 이곳이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관리실에 말을 해서 경고 메시지를 보냈건만 이번에는 아시안컵 축구라는 변수가 있었다. 침실에서 우렁찬 소리로 떠들며 축구를 보는 것 같았는데 그 시간이 또 자정 이후였단 말이지.


원래 관리실에서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면 야간 당직 경비원을 불러 처리하고 내가 직접 가서 싸우지 말라는 조언을 해주었는데 순간 이성을 잃고 벽을 세게 쳤다. 역시 한국인에게는 힘대 힘으로 붙어야 하는 것인가. 벽을 치자마자 거짓말처럼 소음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한국에서 일을 할 때 팀장과의 관계에서 부당한 일을 겪고 HR팀에 보고했고 임원과 이를 두고 상담을 진행한 적이 있다. 그는 나에게 감정적으로 행동했다며 감정을 다스려야 사회생활에서 성공한다는 말을 본인이 감정적으로 내뱉었다. 말을 하는 그의 표정과 말투에 나에 대한 경멸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순간 나는 겁을 먹었고 임원의 말도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네네 하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성과평가 시 나에게 이해할 수 없는 근거를 들어 낮은 평가를 했고 그 근거를 묻는 나에게 다시 감정적인 말을 쏟아냈다. 일련의 상황을 겪으며 부당함에 분노하는 나는 감정적인 사람으로 취급되었지만 나에게 평가를 한 임원은 아무리 감정적인 대응을 해도 그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았다. 이때의 내가 얼마나 분노했었는지, 지금도 그때만 떠올리면 뒷골이 서늘하다.


벽을 두드리느라 시퍼렇게 멍이 든 손을 바라보며, 나는 매우 속이 시원했다. 어쨌거나 자정 이후 시끄럽게 떠드는 이웃에게 나의 의사를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과 의사를 표현하면 온갖 이유를 들어서 '니가 이상한 것이다'라고 가스라이팅을 하는 상황에 너무도 오래 처해있다가 이렇게라도 나를 표현하니 커다란 해방감을 느꼈다.


다만 이러한 상황에서 쓸데없이 나의 감정을 소비하는 것은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런 부당한 상황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고 그것이 벽을 치건, 경비원을 부르건, 직접 찾아가 따지건 '나의 권리'를 위한 실제적인 액션을 취할 것이다. 하지만 그럴 가치도 없는 상황 때문에 분노해서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것은 그만해야겠다.


감정과 행동을 분리하고 내가 원하는 결과를 이루어내는 것. 이번 벽간소음 사건을 통해 그것을 조금이라도 연습해보려고 한다.


평화로운 치앙마이에서는 참으로 다양한 일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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