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송당 Sep 08. 2023

글쓰기

#치앙마이 일년살기

미국의 슈퍼모델 지젤 번천이 원래는 건강 같은 거 신경 안 쓰고 막살다가 공황장애를 겪은 후부터 건강을 돌보기 시작했다는 내용의 영상을 봤다. 나는 공황장애로 진단받지는 않았으나 공황발작은 1회 경험하였고 그 이후부터 열심히 나 자신을 챙기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이 공황이라는 증상은 뇌가 몸에 보내는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경고 신호로구나 다시금 깨닫는다.


공황발작이 온 후, 운동을 하고 매일 글을 쓰고 식단을 신경 쓰고 술도 멀리하며 커피는 하루 한 잔으로 제한하고 나를 지지해 주는 친구와 서로를 위로하는 대화를 나눈다.


그렇게 2주 정도의 시간이 흐른 걸까? 오늘 문득 카페에서 책을 보는데 내가 이런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위로받았다.


치앙마이 대학교 안에 위치한 어느 카페


카페와 주위 풍경이 너무 예뻐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이래서 환경이 정말 중요하다는 말들을 하는 걸까. 대학생들이 주로 와서 공부하는 공간인데 여기서 그 어떤 공부를 한다고 해도 다 A학점을 받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샘솟을 정도로 평화롭고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치앙마이 대학교 학생들에게 돌 맞겠지...)


여기서는 나를 쫓는 사람이 없다. 나는 오로지 나만 돌보면 된다. 읽고 싶은 책도 마음껏 읽고 쓰고 싶은 글도 마음껏 쓰자.


글쓰기는 내 안의 숨은 욕망과도 같은 행위이다. 이제 말을 꺼냈으니 더 이상 숨은 욕망은 아니겠지.


글을 잘 쓰고 싶다.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먹고살고 싶다.


글쓰기를 뒤늦게야 시작하게 된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자신감 부족이 가장 크다. 나는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여 시작도 하지 않았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나는 감독이나 PD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절대로 재능을 갖고 있지 않다고 확신했고 각본을 써보겠다는 시도도 제대로 하지 않고 포기했다.


예전에 읽었던 어떤 책에서 난관에 부딪혔을 때 쉽게 포기하는 태도는 양육환경을 통해 결정된다고 했다. 정확히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는데, 부모가 지나치게 통제하는 환경에서 자라면 그렇다고 했다. 꽤나 신빙성이 크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내가 그렇기 때문이다. 부모님, 특히 아빠의 말을 거역하면 따르는 엄청난 폭력을 경험한 나는 내 의견을 내는 것을 참 많이 포기했다.


글쓰기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을까? 회사에 다니면서도 그렇게도 보고서를 많이 쓰는 직무를 맡았다. 보고서 쓰기는 다들 기피하는 일이었다. 보고서를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다들 주기 싫어하는 정보를 굽신거리며 취합해야 하며 잘 써도 인정받지 못하고 못 쓰면 크게 욕을 먹으니까. 나는 보고서의 글이나마 쓰면서 즐거웠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참 많은 길을 돌고 돌아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카페에서 읽은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다. 하루키는 풀코스 마라톤도 여러 번 뛴 소위 말하는 달리기 덕후인데 그가 달리기를 하면서 하는 생각 같은 것들을 별다른 주제 없이 편히 쓴 수필집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크게 위로받았다. 하루키의 다른 수필집인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는 것 같은데, 이 책에서도 후천적으로 작가의 자질을 향상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인스타 감성과는 거리가 먼, 브런치 글쓰기를 위한 기록용 사진


재능이 뛰어나다면 좋겠지만 모든 작가가 그런 행운을 갖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재능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집중력과 지속력인데 이것은 훈련을 통해 충분히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때로는 이렇게 꾸준히 집중력과 지속력을 키우다가 작가의 재능과 만나기도 한다. 만년에 재능을 꽃피운 작가들도 그런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대학교시절부터 포기하지 않고 글쓰기를 계속했다면 지금쯤 뭔가를 이룰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미성숙했고, 감정적으로 어쩌면 지금보다도 더 불안했다. 부모님에게서 독립하지도 못했던 시기다. 그러니 지금도 늦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이제는 부모님의 지원이 없어도 충분히 홀로 설 수 있고 감정을 컨트롤하는 방법도 배워나가고 있다. 왜 몸과 정신건강을 관리해야 하는지도 확실히 깨달았고 이로 인해 유흥에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이, 치앙마이에서의 이 시간이 내가 글쓰기를 위해 훈련할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일 것이다.


더군다나 무에타이 훈련도 꾸준히 하고 있다. 하루키가 달리기 훈련을 통해 작가로서의 집중력과 지속력을 향상하는 방법을 깨달았다면 나에게는 무에타이가 그럴 것이다.


재미있는 것이, 책에서 하루키는 달리기를 할 때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며 긴 코스의 달리기를 끝냈다면 '드디어 끝났다'라고 생각할 뿐이라는데 나도 그렇다. 무에타이를 하면 '와 힘들어 죽겠다' 정도의 생각만 한다. 하루키에게는 달리기가, 나에게는 무에타이가 마음속 번잡한 생각을 비워내는 명상 같은 것이 아닐까?


하루키와 내가 다른 점은, 하루키는 달리기를 더 잘하기 위해 집요할 정도로 체계적으로 훈련한다는 것이다. 식단까지도 바꾸었다고 한다. 나는 아직 그 단계까지는 가지 못했는데 그렇게까지 하고 싶어 졌다. 무에타이를 통해 내 몸을 통제하는 법을 익히고 그 방법을 글쓰기에도 적용하여 나만의 루틴을 만들어가고 싶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나도 작가의 재능과 만나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지금은 자정이 가까운 시간, 치앙마이에는 꽤 많은 비가 내리고 있고 창밖의 풀숲에서는 어렸을 적 시골에나 가야 들을 수 있던 풀벌레들의 합창소리가 들린다.


그래, 이런 환경에서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참 위로가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백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