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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당 Sep 06. 2023

나는 백수

#치앙마이 일년살기

만 37세 여성, 무직. 현재 나의 상태를 매우 간결히 표현한 문장이다. 무직, 백수. 이런 타이틀을 갖는 것은 꽤 오랜만이다. 이전에는 직장이 없는 상태의 나 자신을 견디지 못해 불안에 떨었는데 그 직장이라는 곳에서 온갖 고초를 다 겪고 나니 지금은 예전처럼 두렵지는 않다. 


직장에 속한 것이 최고인 줄 알았건만, 생각보다는 꼭 그렇지만도 않더라. 회사는 K팝 아이돌 시장 같은 것이다. 치열한 경쟁시장이고 블랙핑크나 뉴진스처럼 대박이 나는 경우는 극소수다. 대다수의 기획사, 가수들은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진다. 회사도 그렇다. 아무리 회사 브랜딩을 잘하고 우리는 대단한 회사라고 외쳐도 대다수의 회사들은 지구상에 존재했었는지도 모르게 사라져 간다. 


아, 내 전 직장은 구조조정에 들어간다고 했다. 희망퇴직을 받는다는데 전 직원의 50%가량이 신청했다고 한다. 목을 빳빳이 세우고 직원들의 의견을 전혀 귀담아듣지 않고 독단적으로 의사 결정하던 리더십이 떠오른다. '그렇게 니들 잘났다며, 결국 결과가 이건가?' 


별것도 아닌 것 때문에 내 시간과 건강을 너무 해쳤다. 물론 이러한 상황을 경험해 봤기에 다음번에는 그렇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 


오늘의 치앙마이는 오랜만에 비가 내린다. 9월까지는 우기여서 비가 오는 게 당연한데, 도착 후 2주간 비다운 비가 내리지 않았던 터라 오히려 반갑다. 무더위가 한풀 꺾이는 기분이다.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몸을 혹사시키며 운동을 했던 게 탈이 났는지 하루의 절반은 누워서 보냈다. '혹사'라는 단어가 맞는 까닭은 하루에 2만보씩 걷고(적어도 1시간 이상 걸음) 거기에 더해서 주 4회 한 시간 반짜리 무에타이 수업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 워낙 체력은 자신 있는 나였다. 고작 이걸로 지치다니... 가는 세월은 붙잡지 못하는 건가 싶어서 씁쓸한 마음이지만 쉬이 포기할 생각은 없다. 회사에서 당한 혹사는 '이런 회사는 피해야 한다'는 교훈밖에는 남기지 않지만 운동은 어쨌거나 내 몸에 남을 테니까. 그 누구도 운동의 효과는 빼앗아 갈 수 없을 것이다.


베란다에서 보이는 풍경이다, 그냥 멍 때리고 이 풍경만 바라보았다


운동도 안 하고, 어디 나가지도 않고 하루종일 집에서 뒹굴거리고 간단히 청소를 하며 보냈는데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래도 되나?'라는 의구심이 살짝 고개를 내밀었던 것도 사실이다. 22년에서 23년으로 넘어가던 12월과 1월. 일이 너무 바빠서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도 없을 정도로 일만 했던 적이 있다. 재택근무 시기였기에 새벽까지 일하고 쓰러져 잤다가 일어나서 책상 앞에 앉아서 바로 일하고의 반복이었다. 몸은 축이 났고 일을 해도 해도 남아있는 업무량에 숨이 턱 막혔다. 내 리더십이라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전혀 배려해주지 않았고 내가 업무 진행의 책임을 갖고 일하는 상황임에도 참견하여 일을 더 크게 벌였다. 갑자기 보고서 문장을 점검하고 '이렇게 쓰면 안 되는 거라고' 하더라. 걔들 말에 맞추어 보고서를 다시 쓰느라 또 야근을 했다. 각 팀이 자신들의 KPI만 신경 쓰느라 제대로 진행되지 않던 프로젝트를 내가 스파이더맨처럼 손목에서 거미줄을 발사해서 하나씩 잡고 있던 것이었다. 내가 아니었다면 2억짜리 프로젝트는 시작도, 끝도 내지 못했는데 리더십은 이에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이 보고서의 트집이나 잡았다. 그렇게 살았던 것이 불과 몇 달 전인데 지금은 주중임에도 할 일이 없어 빈둥거렸다. 비 온다고 밖에 나가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서 창 밖을 바라만 보았다. 


귀국하여 다른 일을 찾거나 혹은 내 일을 시작하면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이다. 공황발작 증상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마음에 와닿지 않았을 텐데 이제는 알겠다. 나에게는 쉼의 시간이 필요하고 지금은 다시는 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이니 하루하루 이 빈둥거림의 시간을 즐겨야 한다. 나는 이제 회사에 속해있지 않고 내가 이해도 못할 OKR이나 KPI를 강요받고 있지도 않다. 자꾸 내 마음은 내가 일하던 시절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그럴 필요 없다고 나를 더 많이 달래주어야겠다. 


여기는 회사가 아니야, 마음 편히 너의 시간을 즐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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