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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당 May 16. 2024

이미 죽은 노인처럼 사는 삶

#치앙마이 일년살기

무더위를 적셔줄 비가 시원하게 내리지만 나의 마음은 아직 고통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있는 상태는 나라는 사람의 디폴트값인 것만 같고, 이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것저것 해보는 것이 치앙마이에서의 나의 삶이다. 금주도 하고, 운동도 하고, 책도 읽고 아주 난리도 아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나 싶을 정도로 평온하다. 하지만 내면에서는 나름의 치열한 전투가 진행된다.


언제부터 이런 부정적인 사고에 빠져 살았을까. 너무 오래전부터 그랬던지라 언제 시작된 것인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가정환경 자체가 부정적인 감정이 팽배한 곳이었기에 부정적인 감정이란 나에게는 고향같이 익숙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30대 중반, 나에게 오랜 기간 폭력을 행사한 아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조금은 멈출 수 있게 되었을 즈음 엄마로 인한 고통이 시작되었고 동시에 회사 생활에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 상황을 맞이했다.


그러니까, 머릿속에서 재생할 재생목록이 원래는 [아빠] 하나였다가 [엄마], [직장상사A], [직장상사B], [회사대표]와 같이 급증한 것이다. 아주 그냥 환장할 노릇이었다. [아빠]만 재생하고 있어도 자다가 오열을 하는데 그 비슷한 급의 재생목록이 이렇게 많아지다니. 혼자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심심할 틈이 없었다.


최근에는 부정적인 생각의 재생을 멈출 수가 없어서 피가 마른다라는 느낌까지 들어서 괴로워하다가 정말 그냥 문득 인터넷 서점에서 '반야심경'을 검색해 보았다. 나름 불교의 나라 태국에서 지내고 있고, 가끔 동네 사원에 가보면 불경의 내용을 영어로 적어놓은 팻말 같은 것들이 있는데 내용이 괜찮았단 말이지. '불교'라고 검색하니 이상한 책만 검색되어서 알고 있는 유일한 경전의 이름인 '반야심경'으로 검색하니 괜찮은 책이 검색되길래 E-book으로 사서 읽는 중이다.


반야심경 마음공부


반야심경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준 해설서 같은 책이다.


금방 한 챕터를 다 읽었다. 내용은 살짝 어려운 편인데 뭐랄까, 책을 읽는 것만으로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 기분이다.


책의 첫 번째 챕터는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행할 때에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보고 고통과 액운을 넘어서게 된다."라는 구절을 풀어서 설명해 주는 내용이다. 엥? 더럽게 어렵다. 다행히 작가가 이게 무슨 뜻인지에 대해 상세히 풀어 설명해 준다. 작가에 따르면 '반야'라는 지혜가 인생의 고통을 벗어나게 해 줄 퍼울트라캡짱 같은 건데 이 반야의 상태를 이루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수행을 하면 된단다.


1. 보시 : 남의 슬픔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2. 지계 : 좋은 일 해라

- 살생 금지

- 도둑질 금지

- 음탕함 금지

- 헛된 말 금지

- 이간질 금지

- 험한 말 금지

- 아첨 금지

- 탐욕 금지

- 화냄 금지

- 어리석음을 일으키는 것 금지

3. 인욕 : 타인으로 인해 모욕이 생겼을 때 분노하지 않는 것

4. 정진 : 좋아지려는 힘, 잡념을 없애고 생에 집중

5. 선정 :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선이고 마음이 어지럽지 않은 것이 정. 선을 통해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갖가지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을 수행하고, 정을 통해 자기 마음을 안정시켜 어지럽지 않게 하는 법 수행


부처는 반야의 상태를 이루어서 자신과 중생을 고통에서 해탈시켰다. 하지만 일개 인간인 우리는 현실이 무겁게 마음을 짓누르는 상태에 놓여있다. 현실을 이겨먹으려고 맞서 싸우거나 혹은 이미 죽은 노인처럼 현실에 순응한다. 현실을 나의 외부에 있는 것이라고 여겨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나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나 자신이 투사된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현실을 바꾸려고 피똥 싸게 덤비면 결국 변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그게 아니라 나 자신에 집중하고 나를 바꾸려고 하면 결국은 정말로 현실이 변하게 된다.


이 대목을 읽고 누가 내 뒤통수를 한 대 빡 치는 기분이었다.


우선은 현실에 순응해서 '이미 죽은 노인처럼' 되어버린다는 구절이 무서울 정도로 마음에 와닿았다. 이런 느낌은 이미 내가 20대일 때부터 느끼던 것이다. 항상 현실이 버거웠다. 아빠한테 맞거나 혼날까 봐 두려웠고 이런 두려움을 누구에게도 표현할 수 없어서 힘들었다. 아빠라는 현실을 바꾸려고 노력도 해봤지만 결국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나는 그렇게 아빠라는 현실에 순응했다. 순응한 나는 삶을 이미 다 살아버린 느낌이었고 앞으로의 내 인생에 대한 그 어떤 청사진을 그릴 수 없었다. 그냥 살아있으니 살았다. 아주 정확하게 내가 노인 같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많다.


아니 책의 저자는 이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비록 나는 이 사람을 실제로 만나본 적이 없지만, 책을 통해서나마 현실에서 내가 느끼는 고통을 정확히 표현해 준 것만으로도 이 사람과 연결이 된 기분이고 삶이 위로받은 기분이었다.

*저자는 페이융이라는 중국 불경 연구가다.


그리고 반야심경은 고대 인도의 불교 경전이라는데, 고대 인도 사람이 쓴 경전이 왜 2024년에 생존해 있는 현대인에게 먹히는 것인가. 반야라는 지혜에 도달하기 위해 하라는 일 중에 '인욕'이라는 것이 있다. 이게 타인이 아무리 개빡치게 해도 자비로 돌려주라는 말인데 내용을 보자마자 반감이 생기기는커녕 고개를 끄덕였다.


내 머릿속에서 계속 부정적인 생각이 재생되는 것은 타인에게 받은 모욕으로 인한 분노 때문이고, 이것은 내 온몸을 불태우고 눈을 멀어버리게 할 정도의 강력한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자라면서 부모님에게 배운 것이 분노의 감정뿐이니 나 역시 그렇게 된 것은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특히 아빠처럼 행동하는 보수적인 사람들을 보면 분노했는데, 그 분노의 끝은 항상 내가 지쳐 나가 떨어지는 것이었다.


이 지점에 있어서 기독교에도 비슷한 교리가 있는 것을 보면 인생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의 통찰은 비슷한 것인가 싶기도 하다.


내가 갑자기 이 인욕이라는 단계를 이루어 내지는 못하겠지만 내가 느끼는 이 거대한 분노를 외면할 것이 아니라 그 실체를 들여다보고 이 감정을 다스리려고 노력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현실을 바꿀 수는 있는데, 그것은 나의 외부의 요인을 바꾸려고 하는 것이 아닌 나 자신을 바꾸면 이룰 수 있다는 말. 이 말도 큰 깨달음과 위로가 되었다. 그걸 해내기 위해 치앙마이에 들어와서 홀로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는 내가 올바른 길로 가는 중이라고 작가가 어깨를 토닥여주는 것 같았다. 


*치앙마이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인 '앙깨우 저수지'


미세먼지 시즌에는 잘 가지 않다가 비가 내리고 날씨가 좋아져서 냉큼 길을 나섰다. 앙깨우 저수지는 치앙마이 대학교 안에 있는 매우 큰 저수지로 주변에 산책로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어느 시간대에 가도 좋지만 오후 5시에서 6시 사이에 가서 해가 질 때의 모습을 관찰하면 그렇게 좋을 수 없다. 특히 구름이 예술이다. 


오랜만에 앙깨우 저수지의 구름을 바라보면서도 따뜻한 위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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