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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당 Jun 04. 2024

감정의 이멀전시 상황

#치앙마이 일년살기

어제부터 이상하더라니, 오늘 기어이 우울한 감정이 수면 위로 힘차게 솟구쳐 올라옴을 느꼈다.


최근 부정적인 생각은 꼬리를 물었고 결국은 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하던 참이었다. 죽음이 언제 올지 몰라 두려운데, 어차피 죽으니 열심히 살 이유도 없지 않나? 대체 내가 왜 살아야 하지? 이런 생각이었다.


치앙마이에 있으면서 일도 안 하고 술도 마시지 않으니 나의 감정 상태에 대해 보다 더 예민하게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도 '어, 이건 심각한데?'라고 곧바로 깨닫고는 의욕이 없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나를 거칠게 잡아채고는 무에타이 체육관으로 보내버렸다.


원래는 우울하거나 불안한 감정이 올라오면 운동을 하면 나아지고는 했는데 이번에는 이 기분이 운동을 할 때까지 영향을 끼치는 거라. 운동을 하면서도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힘겹게 참아내고는 어찌저찌 운동을 끝마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물류 스타트업에 다닌다는 태국인 친구는 퇴근 후 운동시간임에도 중국인 보스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의 중국인 보스는 일을 엄청나게 해대서 퇴근 이후에도 업무 관련 연락을 끊임없이 한다고 했다. 나 역시도 한국에서 일할 때는 '슬랙'이라는 메신저를 쓰는데, 퇴근 이후에도 슬랙의 알람이 '띠링띠링띠링띠링' 울렸다고 말했다. 내 말을 듣자 그는 이해한다며 한참을 웃었다.


나도 한 때는 저런 때가 있었지. 그런데 왜 대체 그렇게까지 시달리며 일했어야 했을까? 집, 학교, 회사까지. 나는 왜 내 인생의 전 과정에서 끔찍한 성과주의에 시달려야 했을까. 어차피 인간은 죽는데 모든 것은 다 무의미하지 않나.


생각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나가서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10분 남짓한 시간 동안에도 나에게 믿을 구석이 되어 주지 않은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터져 나왔다. 운전하면서 정신이 다른 곳에 팔린 것이다. 사고가 날 수도 있으니 '아, 이러면 안 돼'라고 생각하며 정신을 최대한으로 집중해서 겨우 집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우니 '아 이건 진짜 이멀전시(emergency, 응급) 상황이다'라고 깨달아 미안하지만 나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친구에게 이런 일로 연락하는 것은 너무도 미안한데 이러다 내가 더 위험한 생각까지 할 까봐 너무 두려웠다. 친구와 현재의 감정상태에 대해 나름은 차분하게 대화했지만 사실은 얼굴에서는 눈물 콧물 다 쏟아가며 울어내고 나서야 이멀전시 상황은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이런 일로 연락할 때면 어차피 우느라 말을 못 해서 전화 대신 카톡으로 대화한다.


치앙마이에서 생활한 지 10개월 차. 초반 2주는 매일 울었고 그 이후에 작년 12월 정도에 한 번, 그리고 6월인 오늘 또 한 번 크게 울었다.


나름 잘 관리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예상하지 못한 순간 우울감은 최대치로 터져 나온다. 얼마나 더 관리를 해야 나아질 수 있는 걸까. 퇴사를 하고 치앙마이까지 와서 금주를 하면서 버텨내고 있는 데도 나아지지 않는다면 이제 정말 끝장난 것이 아닐까?


친구는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내일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라고 했다. 그래 그래야지. 말차 초코맛 아이스크림을 먹겠다고 했는데 그걸 파는 곳이 어디 있을는지 모르겠다.


친구와의 연락을 끝내고, 어제 본 축제가 떠올랐다.


현재 태국 전역은 PRIDE라고 불리는 성소수자 축제의 물결이 한창이다. 6월 내내 진행된다고 한다. 사실 엄청 감동적인 의미에서 축제를 한다기보다는 관광객 유치를 위한 목적이 매우 강하다. 관광대국인 태국이 동남아의 다른 국가들에 밀리는 중이라고 하며 이에 태국 정부는 비자 규제를 완화하고 각종 축제를 밀어주기 시작했다. 성소수자 축제를 총리까지 나서서 홍보 중이다. 애초에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딱히 없는 나라인지라 축제는 성대하고 평화롭게 진행 중이다.



태국의 주요 도시인 치앙마이에서도 축제가 진행 중인데 어제 우연히 시내에 나갔다가 행사가 진행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 화려한 복장을 입은 성소수자 셀럽들이 무대에서 워킹 같은 것을 한 후에 퍼레이드 차량을 타고 시내를 한 바퀴 도는 것 같았다. 뽕삘이 진하게 나는 태국 전통 음악 공연도 이어졌다.


태국식 트로트가 궁금하다면 클릭해보시길


행사 참여자 중 매우 덩치가 큰 트랜스젠더 여성 분이 계셨는데 배가 매우 많이 나왔지만(?!) 굉장히 과감한 복장을 입고는 한껏 즐거운 얼굴로 행사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인상 깊었다. 나는 그녀에 비해서는 홀쭉한 편이지만 그럼에도 내 몸이 부끄러워서,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서 저런 과감한 복장은 입어볼 생각도 못하고 살았고 심지어는 사진을 찍히는 것조차 싫어한다. 이런 내가 보기에 그녀는 당당하고 행복해 보였다.


대체 행복은 뭘까. 어제 그분을 붙잡고 한 번 물어볼 것을 그랬다.


내일은 꼭 친구 말대로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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