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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당 Jun 08. 2024

사고의 전환(이란 걸 나도 해보고 싶어)

#치앙마이 일년살기

태국어 어학원 친구들과 함께 짧은 소풍을 다녀왔다.


목적지는 치앙마이 올드타운에 위치한 유명한 사원인 '왓쩨디루앙'이다. '인타킨 축제'라는 것이 열린다고 하여 보러 갔다. 어학원 선생님에게 대충 내용을 들어보니 치앙마이를 수호하는 기둥(돌) 같은 것을 기리는 축제라고 한다. 기둥은 치앙마이를 세울 때 땅을 파서 묻어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불교 축제는 아니고 일종의 애니미즘(Animism)이라고 해야 할까.


기둥은 왓쩨디루앙 사원 바로 옆의 사당에 모셔져있다. 왓쩨디루앙은 유명해서 여러 번 가봤었는데 이 건물이 이런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사원 앞에 도착하니 축제에 참여하려는 인파로 교통 체증이 발생할 정도였다. 동네의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등등에서도 아이들이 단체로 많이 참여했는데 학생들을 통솔하는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덱덱'이라고 부르며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것을 보고 웃음이 났다. 덱덱은 어린아이를 뜻하는 태국어 단어다. 어감이 참 귀엽지 않나?


함께 간 어학원 선생님은 공물로 바칠 식물 바구니 같은 것을 하나 사서 우리에게도 조금 나누어주었다. 풀떼기 같은 것과 향을 함께 묶어놓은 것인데 이것을 사당 및 사원 곳곳에 바치며 기도를 올렸다. 도시의 수호 기둥이 모셔진 사당은 여성은 출입 금지라서 남성인 친구들이 대신 들어가서 공물을 바치고 나왔다. 여성이 출입 금지된 이유는 당시(거의 700여 년 전)에는 여성이 생리를 하기 때문에 깨끗하지 않은 존재로 여겨져서 성지를 훼손시킬 수 있다고 믿었단다.



사당 투어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사원을 둘러보는데 돈만 내면 할 수 있는 갖가지 '기도 이벤트 코스'가 마련되어 있었다. 비싸지 않기는 한데, 금박 같은 것을 사서 자신의 띠 혹은 자신이 태어난 요일의 조각상에 붙일 수도 있다. 이게 대체 불교랑 뭔 상관인가 싶었지만 재미있어 보여서 나도 해봤다. 사원의 메인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는 스님에게 시주를 하고 스님의 축복을 받기도 했다. 스님은 손목에 실 같은 것을 묶어주신 후 법문을 읽어주셨다. 이 모든 것을 현금이 없어도 QR결제를 통해 할 수 있었다. 여성은 사당에 출입 금지인데 시주는 QR코드로 받다니. 과거와 현재가 이딴 식으로 공존하는 건가 싶어서 재미있었다.



무교인 나에게 이런 자본주의적 기복행위(복을 비는 행위)는 별다른 흥미가 없는 행위였으나 최근 극심한 우울 증상을 겪고 있는지라 이 모든 행동이 다르게 보였다. 이 작은 행위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다면 이건 정신과 진료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삶에 아무런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하루 종일 힘없이 헤롱거리는 것보다는 약간의 비용을 지불하고 '나는 부처님(혹은 본인이 믿는 종교의 신)에게 복 받았음'이라고 믿는 것이 낫지 않을까.


사원에 머무는 순간만큼은 나도 최선을 다해 '기원'이라는 것을 해봤고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고 오랜만에 극 T성향을 가진 친구와 연락을 했다. 나는 극 F성향이고 이 친구는 극 T성향인데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게 된 이후로는 다툴 일이 전혀 없어진 친구다. (그전에는 많이 다투었다는 소리)


잘 지내냐길래 간략히 상황을 보고하는 의미로 우울증 사태를 브리핑해주었다. 친구의 성향을 아는지라 별다른 반응을 바란 것은 아니고 순수한 의미의 상황 보고였다. 친구는 빨리 한국에 돌아와서 정신과에 가라는 T다운 해결책을 말해주다가 문득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내가 이런 소리를 하면 자신은 뭘 해줘야 할지 모르겠어서 폭탄을 맞는 기분이라는 것이다. 본인이 정신과 의사도 아니고 상담을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떡하냐고 했다.


이 친구를 잘 모르는 사이었다면 살짝 상처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어림도 없지. 나는 이것이 친구가 나를 걱정하는 반응인 것을 안다. 해결책을 주고 싶은데 그게 안 돼서 힘들다는 소리. 애초에 나를 위해 해결책을 찾으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이 친구가 나를 아낀다는 의미다.


그래서 '해결책을 바라는 것 아님, 대화만으로 위로받음, 해결책은 내가 찾고 치료는 정신과에서 받겠음'이라고 간단히 답변을 해주었다. 이 말을 듣자 친구는 '본인이 도움을 못 주어서 내가 힘들어하면 미안하잖아'라고 말하며 내 예상이 맞음을 증명하였다. 나 같은 F형 인간은 T형 인간이 방법은 모르지만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생각했다는 것만으로도 눈에서 눈물이 핑-돈다.


그러나 친구는 내가 왜 우울증에 시달리며, 왜 우울증에 이렇게 대처하는지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철학책이나 불교서적을 읽는다고 하니 다 때려치우라고 했다. 그럴 시간에 재미있는 걸 보란다. 자기는 죽기 전에 재미있는 것들을 다 보지 못할까 봐 두렵다고 했다.


아, 정말이지 나와 다른 믿음이구나. 순간 머릿속에서 느낌표(!) 하나가 삐용, 하고 떠올랐다.


나의 경우 우울함이 극에 달하면 발생하는 가장 대표적인 증상이 죽음에 대한 공포이고 이것 때문에 요 며칠간 인생에 대한 회의로 인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죽음 때문에 더 재미를 추구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얼마 전에 빌리 아일리시라는 유명한 뮤지션이 인터뷰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이 인터뷰에서 빌리는 자신이 언젠가는 죽어 없어진다는 사실이 너무도 편안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어차피 모두가 다 죽는다. 그러니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어차피 다 죽어서 기억하지 못하는데 무슨 상관인가 싶어서 편하다고 했다. 오히려 죽음을 통해서 엄청난 해방감을 느끼고 자신이 하고 싶은 걸 다 해보는 것이다.


와, 빌리의 인터뷰도 충격적이었는데 오늘 친구의 말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같은 상황을 나와는 180도 다른 방법으로 바라보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종교에서 복을 기원하는 행위는 바보 같은 것이 아니고 죽음은 삶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구나.


내가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나의 인생은 달라질 수도 있겠구나.


갑자기 따란, 나는 이제 삶을 즐길 거야!라고 우울함을 곧바로 극복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오늘 느낀 이 깨달음을 계속 곱씹어 보려고 한다.


아, 극 T인 친애하는 나의 친구는 이런 나를 두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쓸데없이 곱씹을 시간에 재밌는 거나 찾아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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