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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당 Jul 08. 2024

배를 가득 채우고 오토바이 여행을 떠나보자

#치앙마이 일년살기

몇 주 전부터 계획해 둔 오토바이 여행을 떠났다.


7.7일, 일 년 중 지인들로부터 가장 많은 연락을 받는 날. 혹은 생일.


아무리 우울증 같은 것에 빠져 있는 나여도 왜인지 모르게 이 날은 챙겨야 한다고 프로그래밍 당해왔으니 그래도 뭘 해보려고 꽤나 오랜 시간을 고민했었다. 근교로 여행을 갈까 했지만 버스에 왕복 10시간을 태우기는 싫었고 결국 일주일 전 즈음에 오늘의 행선지를 결정해 두었던 것이다.


구글맵을 찍어보니 오토바이로 왕복 2시간이라고 표시되지만 워낙 오토바이를 느리게 운전하는 나에게는 족히 3시간은 넘게 걸리리라 예상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장시간의 운전에 앞서 좋아하는 가게에서 아침을 두둑이 먹고 길을 나섰다.


커리 양이 매우 많은데...난 다 먹을 수 있다...


치앙마이 도심을 둘러싸고는 넓은 고속도로와 좁은 국도가 이리저리 섞여있다. 특히 주위에 산이 많아서 산 주변에는 구불구불 작은 길들이 얼기설기 얽혀있다.


구글맵으로 네비를 찍고 달리면서도 샛길이 발견되면 큰 도로를 벗어나서 샛길로 들어섰다. 큰길에서 운전하는 것을 싫어하기도 하고 치앙마이 생활 1년의 경험상 샛길로 빠지면 길의 풍경이 훨씬 더 아름답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중간중간에 이 작은 길들이 너무 예뻐서 오토바이를 멈춰 세우고 사진을 찍기에 바빴다. 때마침 날씨가 어찌나 이리도 아름답던지.


초록초록한 논 뷰가 왜 이리도 좋은지


치앙마이 부근 혹은 태국 북부의 도로를 달리다 보면 구름이 너무 아름다워서 뭐에 홀린 듯 구름을 바라보며 운전하게 된다. 이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구름의 모습을 보며 '내가 구름을 보려고 치앙마이에 왔구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한 시간 반을 넘게 달려 도착한 매왕 국립공원(Mae Wang National Park). 태국에서 가장 높은 산인 '도이 인타논' 근처의 국립공원으로 관광객들에게는 '파처 협곡'이라는 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태국의 국립공원은 외국인에게는 현지인 가격의 5배를 입장료로 징수한다. 매왕국립공원의 경우 태국인은 20바트, 외국인은 100바트. 어딜 가도 태국인 같다는 소리를 듣는 나지만 어째 입장료를 징수하시는 분이 나를 보자마자 영어로 '웨얼 아유 고잉'이라고 물으며 단박에 내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간파하셨다. 아쉽지만(?)외국인 입장료를 지불하고 국립공원 안으로 오토바이를 몰고 들어갔다.


목적지인 '파처 협곡'은 공원 입구에서 20분 정도 오토바이를 더 몰고 올라가야 하는데 가다가 보니 너무 아름다워 보이는 호숫가가 있어서 홀린듯 오토바이를 멈춰 세웠다. 호수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간이 카페가 있어서 커피를 한 잔 시켜두고 풍경을 즐기는데 때마침 일요일에 낮술을 즐기고 있던(!!) 친구들이 생일을 축하한다며 영상통화를 걸어주어서 친구들에게도 멋진 풍경을 덤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


사진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데 무슨 그래픽 디자인을 보는 기분이었다, 때마침 비수기라 한가한 풍경을 양껏 즐겼다


커피를 주문하면서 직원분에게 나름 유창한(?) 태국어 실력을 뽐내보았는데 직원분이 태국어를 잘한다고 칭찬해 주셔서 또 괜히 어깨를 으쓱거렸다.


호숫가의 눈부신 풍경을 뒤로하고 오토바이를 몰아 파처 협곡으로 향했는데, 입구에서 협곡을 내려다보자 이 순간이 오늘의 하이라이트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사진으로 봤을 때는 이 정도의 스케일일 줄 몰랐는데 드넓은 정글을 굽어 내려다보는 것 같은 웅장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MSG를 조금 섞어서 지금까지 태국에서 본 산속 풍경 중 1등이라고 해야 할까.


요 그랜드 캐년 비스무리한 돌덩이가 '파처 협곡'이다


협곡 입구에서 협곡까지는 경사가 꽤 있는 계단을 오르내리는 길을 30분 정도 걷는 짧은 등산로가 조성되어 있다. 등산의 나라에서 온 한국인에게는 그렇게 낯설지는 않은 구성이라 룰루 랄라 신나게 걸었다. 워낙 햇볕이 뜨거워서 땀이 줄줄 흘렀지만 꽤나 잘 걸었다. 치앙마이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술을 끊는 초기여서 체력이 바닥이었는데 이제는 이 정도의 등산은 별로 힘들지 않은 것을 체감하고는 괜시리 뿌듯했다.


협곡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 왜인지 눈이 마주친 외국인 여성과 정신을 차려보니 20여분 가량 대화를 나눴다.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인사를 건네주신 그녀는 미국에서 오신 파멜라씨인데 태국에서 교육비자로 1년을 머물고는 지금은 태국어 공부를 위해 개인 과외를 더 받고 계신다고 했다.


ยินดีที่ได้รู้จัก

인-디 티 다이 루-짝

만나서 반갑습니다.


태국어로 인사를 건넸는데 전혀 못 알아들으시는 것을 보니 확실히 개인과외가 필요하신 수준인 것 같기는 했다. 그녀는 1분도 쉬지 않고 다-다-다-다 말을 건네셨는데 대화가 따뜻하고 산뜻해서 꼭 아름다운 연주를 듣는 기분이었다. 약간 푼수끼의 말 많은 할머니 스타일이랄까. (실제로 곧 손주를 보시는 할머니라고 한다) 얼마 전에 체육관에서 대화를 나눈 호주인 여성과는 대조적인 느낌이었다. 그녀는 '시발 너 T야'의 T형 인간으로 무슨 말만 하면 상대방 말의 꼬투리를 잡고 꼽을 주는 스타일이다. 대화가 탐탁지는 않았지만 계속 경청을 해주었는데 대화를 이어 나갈수록 그녀의 표정이 풀리면서 더 방긋방긋 웃는 것을 보니 T형 인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마음씨가 못돼 먹은 사람은 아니로구나 싶었다. 사람을 좋아하는데 T형이라는 시스템으로 설계가 되어서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것뿐인가, 그런 느낌.


예상치 못한 곳에서의 짧고도 기분 좋은 대화를 마치고 다시 협곡 입구로 돌아와서 한동안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평화를 즐겼다.


이 정도라면 인생에서 역대급으로 잊지 못할 생일을 즐겼구나, 뿌듯한 마음까지 일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생일은 친구들을 만나서 술을 마시는 날이었지 이런 아름다운 여행을 즐기는 날은 아니었단 말이지.


사진에는 담기지 않았지만 시원한 바람이 불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는 풍경이었다


짧은 여행을 끝마치고 다시 치앙마이 시내로 돌아가다 국립공원 입구의 마을에 잠시 오토바이를 세우고 구글맵을 살펴보았다. 갑자기 어디서 술을 한 잔 거나하게 걸친 할아버지가 다가오더니 태국어로 이것저것 묻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커톳 카, 샨 마이 풋 파싸 타이, 풋 파싸 타이 닛 너이'라며 태국어를 조금 밖에는 못 한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 순간 할아버님의 눈이 커지면서 '오오'라고 하시길래 '샨 뺀 콘 까올리 카(저는 한국인이에요)'라고 하니 '깽 막(태국어 잘 하네)'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워 주셨다. 이후 나에게 '물 마실래?'라고 제안해 주셨는데 '마이 뺀 라이 카(괜찮습니다)'라고 거절하며 다시 오토바이를 몰고 시내로 향했다. 할아버지를 마주친 곳 바로 옆 집 안을 살펴보니 무슨 동네잔치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았고 그래서 할아버님이 나에게 물이나 마실 것을 주려고 하신 것 같았다.


이 할아버지와의 만남까지가 오늘 나의 하루를 완벽하게 만들어준 사건이었다. 살면서 언제 태국 시골 할아버지에게 '너 태국어 잘함'이라는 칭찬을 들어보겠는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 카페 직원분과의 짧은 대화, 파멜라와의 짧은 대화, 할아버지와의 짧은 대화. 모두 다 해서 근사한 생일 종합 선물세트 같은 시간이었다.


원래도 생일은 시끌벅적 하지 않게, 정말 친한 사람들 한 두 명과 시간을 보내는 편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만남을 갖지 않아도 괜찮았다. 누군가의 존재에 기대기 보다는 나의 하루를 내가 스스로 만들어냈다.


얼마 전 어느 날에는 우울증 때문에 하루 종일 울면서 공포에 떨기도 한 내가 해냈다고 믿기에는 정말이지 선물같은 일이었다.


아, 나는 오늘을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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