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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당 Nov 15. 2023

나는 분명히 감정을 억누르라고 배웠는데

#치앙마이 일년살기

"회사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결국 감정을 잘 다스리더라고요"


전 직장에서 팀장을 HR팀에 신고한 나와 면담을 하면서 이사가 나에게 건넨 충고다. 내가 이 사건을 두고 너무 감정적이었다는 것을 에둘러 한 말이겠지. 이 말을 하면서 그는 자신이 대기업 생활을 오래 해봤다는 것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에게 감정을 다스리라고 조언한 그는 이로부터 몇 달 후 온라인상에서 채팅으로 나와 대판 싸웠다. 양껏 감정적으로 직위를 이용해 나를 협박하는 발언을 했다. 아니 감정을 다스리라며, 그건 자신에게는 해당되는 말이 아니었나.


오늘은 앞서 언급한 회사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가 앞서 언급한 회사를 나보다 다섯 달 정도 늦게 퇴사하고 치앙마이에 여행 와서 다시 만났다. 그녀와 함께 치앙마이에서 꽤 유명한 노스 게이트 재즈 펍이라는 재즈바를 찾았다.


공연의 시작은 어수선했다. 드럼, 색소폰, 트럼펫, 건반, 기타 등 연주자들이 차례로 들어와서 악기를 세팅했다. 세팅하다가 아는 사람이 있으면 손들어 인사하는 등 전혀 급할 것도 없는 모습이었다. 이 날 트럼펫과 특이한 기타(뉘어놓고 도구로 긁듯이 연주했는데 공상과학영화에 나올법한 소리를 냈다) 연주자 두 명은 나머지 연주자들과 같이 연주해 본 사이도 아니고 오늘 처음 합을 맞춰본다고 했다.


준비가 끝나자 색소폰 연주자가 나와서 관객들과 농담을 하며 공연의 시작을 알렸다. 드럼 연주자는 15살인데 자기 아들이고 여자친구들 만나느라 바쁘다나 뭐라나. 그렇게 연주를 시작하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시골 동네 작은 술집에서 들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수준의 훌륭한 연주여서 듣는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무대랄 것도 없는 협소한 공간에서 너무도 훌륭한 연주가 진행되었다


장소가 협소하여 연주하는 중간에도 연주자들 옆으로 손님들이 계속 드나들었다. 연주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위 말해 '삘 feel' 받는 연주자가 한 명씩 앞으로 나와서 독주실력을 뽐내며 공연을 이어갔다. 악기를 통해 감정을 마음껏 표출하는 연주자들을 보면서 어느새 나도 온몸을 들썩거리며 음악에 흠뻑 취했다. 물론 금주 중이니 손에는 술 대신 탄산수.


나는 분명히 감정을 억누르라고 배웠는데. 감정을 무한대로 발산하는 무대 위 연주자들은 너무도 행복해 보였다.


회사가 아니라 집에서도 그랬다. 부모님은 내가 나의 감정을 표현하면 제재를 가했다. 나의 감정은 대부분 부모님의 감정에 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 감정을 표현하면, 단순히 나의 의견을 말하기만 해도 아빠는 '감히 부모에게 불손하다'며 물리적, 언어적 폭력을 서슴지 않았다. 엄마는 그런 아빠를 알고도 방관했다. 나는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는 법을 모른 채 성인이 되어버렸다.


연주자들 중 부자 관계라는 색소폰 연주자와 드럼 연주자는 연주 중 종종 눈을 맞추며 교감했다. 드럼 연주자는 15살의 나이에 성인 연주자들과 공연하려면 부담스러울 법도 할 텐데 전혀 그런 기색도 없이 자신감이 넘쳤다. 그는 감정이 수용되는 경험을 많이 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 이 친구는 행복하겠구나.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감 넘치고 타인에게 친절한 어른으로 자라나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부러웠다. 내가 인생에서 놓친 것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이제는 감정을 억누르라는 소리는 한쪽으로 치워도 될 때가 아닐까. 더 늦기 전에 내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10년쯤 후에는 나도 나의 감정으로 나를 보는 타인까지 행복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그렇게 하고 싶다. 더 늦기 전에. 부모님에게 배우지 못했지만 뭐 그럼 어때, 내가 스스로 배워 나가면 되지.


이런 생각을 하다가 연주자들을 둘러봤는데 참으로  치앙마이스럽다고 생각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개인들이 무심히 모여 있었다. 건반 치는 독일인은 맥주배가 심하게 나온 중년의 아저씨고 드럼 치는 친구는 15살 중학생이고 트럼펫을 부는 서양인은 남성이지만 언뜻 보기에는 여성으로도 보일만큼 중성적인 외모였다. 연주자들만큼이나 관객들도 각양각색이어서 수많은 인종과 나이의 사람들이 본인이 입고 싶은 옷을 편하게 입고 연주를 즐겼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하나도 안 어울릴 것 같은 것들이 모여서 말이 되는 것이 치앙마이의 매력이다. 부조화일 것 같은데 결과는 조화. 오늘 밤 다시금 깨달았다.


그래, 이 세상에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은 없다. 감정과 개성을 드러내는 것에 잘못은 없다.


그냥 훌륭한 연주를 즐겼을 뿐인데 마음속 돌 덩어리 하나가 몸 밖으로 빠져나갔다.


예술가들은 나같은 일반인도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게 돕는 의사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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