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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당 Jul 22. 2024

김치찌개 매직

#치앙마이 일년살기

23년 8월 중순에 치앙마이에 도착해서 곧 1년을 한 달 정도 앞두고 있다.


일년살기의 대장정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후 일정은 확정하지 못했는데 다음 주에 온라인으로 한국의 회사와 면접 일정이 잡혀 있어서 귀국하자마자 곧장 일에 복귀할지도 모르겠는 상황이 되었다. (물론 면접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


혹시 몰라서 갖고 있던 짐 중에서 그 쓸모를 다한 것들은 중고로 팔고 있는 중이다. 치앙마이에서도 당근을 한다고 해야 할까.


팔 수 있는 것들로는 올해 초 화전시즌*에 사용한 공기청정기와 다 읽은 책, 그리고 나의 애마 125cc짜리 오토바이가 있다.

(*치앙마이의 3월~5월은 화전으로 인해 미세먼지 수치가 전 세계 1위에 등극할 정도로 공기가 안 좋고 이를 화전시즌이라 부른다)


공기청정기와 책은 먼저 내다 팔았고 오토바이는 팔기 위해서 필요한 서류를 신청해 두었다. 외국인이 오토바이를 사고팔기 위해서는 '거주지 증명서'라는 것이 필요한데 기존에 받아두었던 것은 유효기간이 끝나서 태국 주재 한국 대사관에 서류 발급을 신청해 두었다.


공기청정기와 책은 같은 날 거래가 마무리되었다. 공기청정기는 올려둔 가격 대비 300바트, 우리나라 돈으로 12,000원가량을 싸게 주면 바로 사겠다고 해서 그러시라고 했고 책은 올린 가격 그대로 팔았다. 치앙마이에서는 한국어책을 사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한국어책을 판매하는 것은 매우 수요가 많다.


공기청정기를 사간 분은 굳이 만 원을 깎아서 구매하셨는데 책을 구매하신 분은 굳이 나에게 선물까지 얹어주셨다. 채팅에서의 느낌은 중년의 여성분이셨고 나에게 '김치랑 국 좀 가져다 드릴까요?'라고 물어봐주셔서 본인이 만들어서 드시던 것을 나눠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흔쾌히 '남는 것 주시면 감사하죠!'라고 외쳤는데 이게 웬걸, 나오신 분은 아주 댄디한 차림의 중년 남성이셨고 나에게 근처 한식 레스토랑에서 포장해서 가져오신 김치찌개와 김치, 밥을 건네주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만 해도 내가 판매한 책값보다 더 나가서 돈을 받으면 안 되나 싶어 하던 찰나 남성분은 돈과 음식을 건네주시고는 책을 잘 읽겠다 말하시며 번개같이 자리를 떠나버리셨다.


대체 이 분은 왜 이랬을까? 원래 정이 많은 분이신 것인가.


이유야 어쨌건 나는 이 날 하루는 마음이 양껏 따뜻해져서 '나도 이 분처럼 다른 사람에게 친절해야지'라는 생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김치찌개는 너무 맛있었고 양이 많아서 절반씩 나누어서 이틀에 걸쳐서 먹기까지 했다.


양이 꽤 많았다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심란했다. 언젠가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지만 행여 당장 9월부터 회사에서 일을 시작해야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회사라는 공간에서 이기심의 끝자락을 보았고 일을 열심히 하고 잘하는 것보다는 누군가에게 잘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기도 했다. 그러한 진흙탕 속에서 나는 다시금 일을 해낼 수 있는 것일까.


치앙마이 생활에서 가장 좋았던 점을 뽑으라면 '불필요한 인간관계에 시달리지 않은 것'을 들 수 있을 정도로 적당히 사람들에게서 떨어진 삶은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나와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과는 인간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었다. 회사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성분이 건네주신 김치찌개는 너무도 맛있었다. 살짝 칼칼하고 살짝 달았다. 다시 회사생활로 복귀한다면 분명 이전과 다를 바는 없겠지만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내가 타인에게 김치찌개를 먼저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서 사람들과 더 많은 정을 나눌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니 어린 시절 내가 가장 행복하고 설렜을 때는 매년 3월 1일, 개학을 하루 앞둔 밤이었다. '새로운 반에서는 어떤 친구들을 만나게 될까?'라는 생각에 설레어서 잠을 설쳤다. 이렇게 보면 ENFP라는 나의 MBTI는 잘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바로 일을 시작하게 된다면 김치찌개를 떠올려야지. 스트레스를 받기보다는 이들과 나눌 수 있는 관계의 즐거움을 기대해야지. 이런 생각을 하며 불안한 마음이 조금은 잦아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른바 김치찌개 매직이라고 해야 할까.


김치찌개를 건네주신 남성분은 어떤 의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김치찌개를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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