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까지만 해도 화창했던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창 밖으로는 꽤 많은 비가 쏟아졌다.
한국으로 치면 장마철 수준의 비인데 비가 그쳤다 다시 왔다를 반복한다. 9월의 치앙마이는 우기라서 비가 이렇게 내리는 것이 당연하기는 하다. 아마 점점 비가 그치기 시작하고 조만간 날씨가 한국의 가을 날씨처럼 변하리라. 그렇게 되면 치앙마이의 최대 성수기인 겨울 시즌이 다가오는 것이다. 동남아 여행이라면 본디 더운 것을 각오하고 와야 할 텐데 치앙마이는 날씨가 가장 시원한 겨울에 관광객이 몰린다.
비가 쏟아지는 치앙마이
생필품과 식재료가 떨어져서 사러 나갔다가 갑자기 컨디션이 다운되어서 후다닥 장보기를 마치고 돌아왔다. 오늘 하루 종일 푹 쉬고, 글쓰기 약간과 빨래를 돌리는 일만 했음에도 컨디션이 바닥을 친 것이다. 최근 일기에서 3주째 금주 중이고 이로 인해 컨디션이 좋아졌고 정신 건강에도 이롭다고 썼고 그것이 대략적으로 사실이나 역시 나의 완쾌를 판정하기는 이르다. 가족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30년 이상 지속된 것이고, 회사 스트레스도 적어도 10년 이상이다. 스트레스를 알콜, 과로, 과한 운동 등 격한 방식으로 풀어오다가 겨우 3주 몸을 돌봤다고 모든 것이 짜-잔 하고 좋아졌다고 말하면 말이 안 되기는 하다.
장을 보다가 감정이 올라와서 심호흡을 했다. 내가 감정이 올라온다고 말하는 것은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와 불안한 상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감정이 올라오면 주로 두 가지 생각이 드는데, 부모님에 대한 생각과 미래에 대한 생각이다. 둘 다 불안하며 심장을 짓누르는 감정이다. 부모님에 대한 생각은 원망과 죄책감이 뒤엉켜 있고 미래에 대한 생각은 선명하지는 않은데 '내 미래가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다. 이렇게 감정이 올라올 때면 나는 치앙마이에 있지만 있지 않게 된다. 내 몸은 여기서 생활하지만 정신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다. 무에타이를 하는 날이라면 오후 늦게 밖에 나가서 시내를 걷고, 무에타이를 하면서 정신을 다시 치앙마이로 돌아오게 할 수 있지만 오늘은 쉬는 날이라 그것이 어렵다. 이러다가 조만간 주 6회씩 운동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몸은 힘들지언정 마음은 그게 더 편할 테니까.
낮에 내 글에 like it을 눌러주신 다른 작가님의 글을 읽고 댓글을 남겼다. 부모님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셨다는 내용이었는데 나도 비슷한 생각을 자주 해서 공감되었다. 나의 경우는 부모님이 왜 그러는지 이해해 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와 결론을 내린 상황이다.
아빠는 돈에 민감한 사람이었다. 8남매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동네에서 한량으로 유명하였고 결국 집안 재산을 모두 날린 그의 아버지가 진 빚을 8남매 중 가장 많이, 거의 혼자 다 갚았다고 했다. 그것도 건설 현장에서 몸을 쓰는 힘든 일을 하면서 빚을 갚았다. 대학에 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돈에 민감해졌다. 아니, 돈에 사로잡혀 살았다. 자식을 키우려면 돈이 들어가서 그런 걸까, 자식들에게도 친절하지 못했다. 그의 이런 성향은 그가 30대 중반, 주식을 시작하며 더 심해졌는데 그가 신처럼 모시는 돈이 하루에도 몇 % 씩 날뛰는 주식 차트를 들여다보면서 그는 자식들에게, 특히 나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내가 집에 잠시 들른 외할머니를 데리고 산책을 다녀왔다는 말을 했을 때였다. 집 거실 한가운데 놓인 컴퓨터 앞에서 주식 차트만 들여다보던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미친년." 지금도 그 이유는 모르겠는데 주식에 대한 스트레스와 돌아가신 자신의 어머니가 아니라 자신의 장모와 나갔다 왔다고 말하는 내가 미웠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좋은 대학교에 입학하여 그를 빛내주자, 나에게 마음이 약해졌는지 비싼 치과 치료를 해주기도 하였다. 내가 나중에 그의 폭력으로 인해 평생 힘들었음을 고백하자 그는 위로 대신 치과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중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하고 힘들게 일해서 비싼 치과치료까지 해주었는데 네가 나에게 그런 말을 꺼내다니" 이 답변을 듣고 그에 대한 나의 이해도는 더욱 명확해졌다. 나는 그의 인생이 서글퍼졌다.
엄마는 나와 감정교류가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20대 초반, 너무 일찍 남편과의 사이에서 나를 낳고 전업주부 생활을 시작하였다. 남편은 가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를 집에서 살림만 하게 하였다. 아들을 원한 그는 그녀가 쉴 틈도 없이 연년생으로 아이를 갖게 하였는데 때마침 아들이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남편은 다섯 살 어리고 중학교밖에 졸업하지 않은 그녀를 항상 무시했다. 둘의 학력이 같지만 남편은 그녀를 무시하는 것을 통해 세상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풀었을지도 모른다. 30대, 그녀가 카드 대출을 잘못 써서 남편이 약간의 돈을 대신 갚아주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수십 년 간 그의 악행이 시작되었다. 그녀에게 온갖 폭언을 퍼부었고 그 이후로 그녀는 밖에 나가 일을 다니기 시작했다. 배운 것이 없었으니 식당일 같은 것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대신 돈을 갚아준 대가로 10년이 넘게 그녀에게 생활비를 주지 않았다. 그녀의 삶도 고통스러웠으리라. 내 어린 시절 그녀는 감정적으로 불안해 보였고, 남편과 자주 다투어서 나는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 항상 두려웠다.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면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목격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유일한 낙은 백화점에 가는 것이었다. 과소비를 할 돈은 없었다. 백화점 셔틀버스를 타고 영등포 백화점에 가서 가끔 옷 한 두 벌을 사 입었다. 때로는 나도 데리고 갔다. 나는 종종 그녀에게 옷을 그만 사라고 말했다. 나는 자라면서 그녀에게 안기거나, 속 깊은 대화를 나누거나, 의지해본 적이 없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거친 후 내가 성인이 되자 그녀는 갑자기 나에게 정서적인 의지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불안과 고통을 나에게 쏟았고 나와 친근한 관계가 될 것을 일방적으로 요구했다. 나는 그녀가 왜 이러는지 이해하면서도 그 감정이 너무 무거워서 숨을 쉴 수 없었다. 나는 그녀의 인생이 서글퍼졌다.
나는 부모님을 이론적으로는 완벽하게 이해한다. 작년, 상담사님과 상담을 할 때도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상담사님이 왜 이렇게 부모님 입장에서 먼저 그 행동을 이해하려고 하냐고 물었다. 그때는 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은 이러하다. 그들이 나에게 한 행동이 이유가 없는 것이라면 얼마나 슬프겠느냐고. 차라리 이해가 된다면 내가 겪은 고통이 조금은 덜 슬퍼지지 않겠는가.
그런데 여전히 두 사람의 인생 사이에서 힘들었을 나 자신에 대한 토닥거림과 이해는 부족하다. 어렸을 때 너무 잘 웃어서 집안에 복을 가져다주겠다는 소리를 들었다는 나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아빠의 물리적인 폭력이 시작되며 급속도로 웃음을 잃었다. 그때 그 어린애가 얼마나 아팠겠는가. 엄마도 아무리 자신의 삶도 힘들었다고 해도 남편한테 그렇게 맞고 있는 어린 딸을 한 번쯤은 안아서 달래주었어야 하지 않는가.
전 직장에서 권고사직이 진행되었다고 했다. 권고사직이 있기까지 CEO를 비롯한 경영진의 의사결정은 참으로 수준이 낮았다. 그들은 무슨 결정을 하건 '이것이 회사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라는 논리를 내세웠고 그것은 기독교의 성경, 이슬람교의 코란 같은 의미를 지녔다.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나도 나 자신의 CEO니까 나의 이익을 위해서 의사결정을 하자. 아무리 부모님이 효, 인정, 죄책감 등에 호소해도 넘어가지 말자. 나의 이익만 생각하자. 나부터 먼저 나아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