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송당 Oct 03. 2024

에어로프레스는 터질 수 있다

#애프터 치앙마이

신경안정제를 먹고 자면 그래도 아침에는 상태가 괜찮은 편이다.


반대로 약발이 떨어지는 늦은 오후 시간에는 종종 심장이 떨리는 느낌이 나기도 한다.


집을 정리할 기력은 아직 돌아오지 않아 여전히 정리상태가 엉망인 가운데, 그나마 아침에는 커피를 내리거나 과일을 챙길 여력은 있어서 부엌을 사용하고는 있다.


커피는 뭔가 기구를 더 사용할 의지가 없어서 에어로프레스라는 기구를 사용해 간단히 내려 마시고 있다.


압력을 줘서 에스프레소 비슷한 것을 추출하는 원리인데 원두 찌꺼기 처리하기도 편해서 만족하며 사용 중이다.


원두는 치앙마이에서 사 온 치앙라이산 미디엄 로스팅 원두가 한 봉지 남아서 아쉬워하면서, 그러나 오래 두면 맛이 떨어질 테니 빠르게 소진하는 중이다.


엊그제인가는 그래도 밥을 잘 챙겨 먹고자 계란도 부치고 빵에 치즈도 뿌리고 사과도 깎았다.


남은 건 치앙마이산 커피뿐.


평소처럼 에어로프레스로 커피를 내리는데 마지막 단계는 기구를 눌러서 커피를 추출하는 것이다.


늘 하던 단계라 별생각 없이 기구를 누르는데, 이런 일이 벌어졌다.


에어로프레스가 터져버린 것이다.


뜨거운 커피가 팔에도 튀어서 아팠는데, 아파할 겨를도 없었다.


빠르게 치워야지 안 그럼 재앙이다.


피해는 광범위했고 특히 벽지가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벽지는 좋은 거여서 닦으니 금방 지워졌다.


아주 빠르게 다 치우고 겨우 한숨을 돌렸다.


생각을 해보니 에어로프레스에 커피와 뜨거운 물을 담고 뚜껑 같은 걸 꽉 잠갔어야 했는데 그 단계에서 느슨하게 잠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결과 기구는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터져버린 것이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집 꼴을 보면서 나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가 이 엉망을 치워내면서 아주 조금은 마음이 편했다.


나라는 엉망도 치울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리고 에어로프레스가 터진 이유를 알아냈으니 내가 터진 이유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불안감이 최고치를 찍고 내 발로 신경정신과를 찾은 후, 여전히 회사생활까지만 가능하고 집에서는 엉망인 속에서 쓰러져 누워있다.


약을 먹어도 종종 불안감이 올라온다.


그래도 신경정신과에 가는, 전문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행위를 시작했고 이번주 주말에는 상담센터에 가서 검사도 받는다.


어제는 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들어와 휴일인 오늘은 낮까지 쓰러져 있었다.


평소에는 피곤해서 동네를 돌아볼 힘도 없었는데 오늘은 늦게나마 일어나 근처에서 밥도 먹고 커피도 마셔보는 중이다.


아주 간단한 일상인데 이것도 못하고 있다가 오래간만에 해보니 기분이 썩 괜찮다.

(두어 달 전에는 치앙마이에서 무에타이를 하던 내가 한국에선 일상생활도 힘들어하다니 인생, 참 어렵긴 하다)


천천히, 천천히, 걸음마부터 다시 배운다는 생각으로 살아보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부모님에 대한 감정은 분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