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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당 Sep 20. 2023

태국에서 태국어 배우기

#치앙마이 일년살기

치앙마이에서의 어학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태국은 관광을 통해서 확실히 한몫을 제대로 챙기는 나라라는 인상을 항상 받는데, 교육비자라는 제도가 특히 그렇다. 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의 비자 기간은 그리 길지 않은 편이다. 태국인과 결혼하거나 취업을 하는 것이 아닌 상태에서 태국에 장기로 머물기 위해서는 교육비자, 엘리트 비자, 은퇴 비자 등을 받는 방법이 있는데 교육비자가 가장 저렴하다. 많은 외국인들이 비용도 저렴하고 인프라도 좋은 태국에 장기로 머물기 위해 교육비자를 신청한다.


태국의 서울대라는 방콕 쭐라롱껀 대학교의 어학원 과정이 아니라면 대다수의 어학원 과정은 교육비자를 팔기 위해 제공하는 패키지 상품의 느낌이 강하다. (쭐라롱껀 대학교 태국어 과정은 힘들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나마 그것을 조금은 피하기 위해 치앙마이 대학교 부설 어학원을 선택했으나 한 번에 3시간씩 수업인데 3시간 중 30분이 휴식시간이다. 옆자리에 앉은 인도인 중년 남성은 이미 작년에 기초 과정을 들었으나 올해 또 기초과정을 듣는다고 했다. 그냥 비자 때문에 신청한 수업이기에 굳이 어려운 레벨의 수업을 들을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수업에 참여한 많은 외국인들이 그래 보였다. 그래도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옆 자리 친구에게 '니 이름은 뭐니, 어디에서 왔니'와 같은 질문을 하고 답변하는 연습을 성실히들 했다. 인생 대부분 학구열에 불타는 또래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듣다가 뚱한 얼굴의 다 큰 어른들과 수업을 듣자니 텐션이 약간은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영어를 제외한 제3 외국어는 고등학교 때 프랑스어를 잠깐 배운 것을 제외하고는 처음이라 당황스러울 정도로 낯설었다. 딱 하나, 태국에 매우 자주 왔었기 때문에 발음이 익숙하다는 것 말고는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워야 하는 수준이다.


그래도 이곳은 치앙마이의 명문 대학교. 10여 년 만에 대학교 교정에서 수업을 듣는 기분이 주는 오묘함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느낌이다.


공부는 꽤 좋아하는 편이다. 부모님, 특히 아빠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공부여서 그랬는지 정말 죽어라 공부했다. 다만 공부에 대한 접근법은 잘못되었는데, 아빠에게 혼나지 않거나 인정받기 위해서 공부를 했기에 어떤 수준 이상을 넘어가지 못했다. 어제부터 계속 읽고 있는 '불안한 완벽주의자를 위한 책'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피하기 위해 포기하는 경우가 잦았다. 수학은 내가 가장 못하는 과목이었는데 사칙연산 수준에서 외우는 것이 아니고 응용을 해야 하는 문제라면 전혀 나아가지 못했고 결국은 더 공부하는 것은 포기했다. 공부에 대한 접근법이 달랐다면 수학을 조금은 더 잘할 수 있었을까? (대학교는...수학 문제를 외워서 내신 점수를 잘 받아서 수시전형으로 입학했다)


태국에서 교육비자를 받으면 1년간 머물 수 있고 이로 인해 파생되는 경제적 가치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교육비자를 받기 위한 각종 서류 작업이 다 돈이고 교육비자를 받아 생활을 하기 시작하면 월세, 식비, 교통비, 유흥비 등이 추가로 발생한다. 태국은 확실히 관광객으로 먹고사는 나라가 맞다. 아, 태국에서 은행 계좌를 만들거나 자동차/스쿠터를 구입하려면 '거주지 증명서'라는 것을 받아야 하고 이민국에 가면 발급에 3주가 걸리는데 500바트, 우리 돈 2만 원을 내면 다음날 급행으로 발급해 준다. 이런 행정적인 부분은 그냥 이해를 포기한 지 오래다.


돈이 쏠쏠한지 태국 정부는 태국어뿐만 아니라 무에타이, 영어 수업에도 교육 비자를 내어준다. 무에타이는 태국의 전통 무술이니 이해가 된다고 쳐도 영어는 대체 웬 말인가.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한국인들이 태국에서 교육비자로 영어를 배우는 것을 선택하기도 한다. 어차피 어학원 선생님은 원어민이기도 하고 나중에 영어가 더 쓸 곳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도 잠시 흔들렸지만 태국에 이렇게 자주 왔으면서 태국어 알파벳을 읽지도 못하는 나 자신이 한심했고 그동안 흔히 배우던 것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뇌에 자극을 주어서 내가 인생에서 느끼는 '정체감' 같은 것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태국어 수업을 듣기로 결정하였다.


사실 태국에서는 태국어를 한 마디도 몰라도 살아가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깊은 대화는 하기 어려워도 태국의 거의 모든 상인들은 영어를 구사한다. 요즘은 구글 렌즈라는 서비스가 있어서 태국어를 사진으로 찍으면 한국어로 번역을 해주어서 훨씬 더 태국 생활의 난이도가 줄어들었다. 이런 까닭에 태국에서 살아가는 외국인들은 태국인이라는 육지와 구분된 섬 같다는 생각을 한다. 자기네 나라에 와서 태국어 한 마디를 안 쓰고 돈만 쓰다 가는 외국인들을 보고 태국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태국의 관광지나 식당에서는 외국인과 내국인의 입장료, 식사 금액을 따로 구분해두기도 한다. 버젓이 금액을 다르게 표기해 두는데 외국인들은 거의 다 태국어를 읽지 못해서 이런 행위에 따지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다.


태국어는 5개의 성조가 있고 문자가 어렵기로 악명이 높다. 지인 중 대학교에서 태국어를 전공한 분이 계시는데 그녀도 문자 때문에 태국어를 포기할까 생각한 적이 있다고 했다. 오늘은 고작 7개의 문자를 어떻게 읽고 쓰는지 배웠는데 어떤 문자는 '닭'의 모습을 닮았다. 귀엽기도 하고, 내가 나중에 태국어를 읽을 날이 올까? 싶기도 하고 다양한 감정이 휘몰아쳤지만 열심히 공부해 볼 생각이다.


태국어... 알파벳이다 이게...


오늘의 글을 쓰는 이곳은 치앙마이 대학교 도서관이다. 내가 졸업한 대학교 도서관의 모습과 큰 차이는 없다. 대학교에 다닐 시절, 공부는 꽤 잘하는 편이었는데 그때도 역시 내가 뭘 하는지는 모르고 암기 위주로 공부를 했다. 성적 장학금을 받아서 칭찬을 받는 게 유일한 목표였을까 싶다. 대학 시절 성적을 내는 것에만 열중하다가 진로에 대한 고민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졸업 후 많이 방황하기도 했다. 내가 왜 공부를 하는지도 모르는데 내가 무엇을 하면서 밥을 벌어먹고 살고 싶은지는 알았겠는가. 전공이 신문방송학이라 방송국 PD시험도 보고, 기자시험도 봤는데 주위에서 그러고 있길래 나도 그랬던 것뿐인지 정말 PD나 기자가 되고 싶은지는 몰랐다.

 

치앙마이 대학교 도서관 풍경, 역시 대딩들은 과제하느라 피곤해 보인다


지금 돌이켜보니 대학생 시절의 내가 참 안쓰럽다. 지금보다도 더 불안한 시기였다.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넘어오는 시기에 각종 치과치료 때문에 많은 돈이 들었고 대학교 등록금이나 학비도 있었다. 그런 비용을 지원받았으니 나는 일탈을 해서도 안 되고 부모님을 거역해서도 안 되고 공부만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야만 한다'는 불안감을 조금은 내려놓고, 내 자신에 대해서 충분히 고민하는 시간을 갖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그걸 대학교를 졸업하고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서야 하는 중이다. 너무 늦지는 않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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