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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당 Sep 22. 2023

사바이 사바이 2

#치앙마이 일년살기

어제의 글을 쓰고 자기 전 태국 특유의 사바이한 분위기에 대해 더 생각해 봤다.


(*사바이 = 태국어로 좋다, 편하다 / 내가 느끼는 태국 혹은 치앙마이 특유의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면서 느긋하게 지내는 분위기)


혹자는 이런 분위기 때문에 치열하게 자기 몫을 찾거나 경쟁하지 않아 태국의 인건비가 낮고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 가난한 것이라고 했다. 조금 더 생각을 이어가 보니 태국의 사바이한 분위기나 낮은 인건비는 태국의 계급 시스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태국은 부의 대부분을 소수의 '하이쏘'들이 독점하고 나머지 '로우쏘'들이 낮은 인건비로 노동력을 뒷받침하는 사회 구조다. 사업은 하이쏘들이 하고 로우쏘들이 값싼 인건비로 하이쏘들의 배를 불려준다.


하이쏘는 high society의 줄임말로 태국 왕족과 중국 출신의 화교·화인을 일컫는 말이다. 화인의 경우 태국에서도 그냥 태국인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태국인으로 동화되어 살아가는 중국계 태국인을 의미한다. 로우쏘는 low society의 줄임말로 하이쏘가 아닌 일반 서민들을 지칭한다.


치앙마이에 있으면서 화인들을 종종 보는데 누가 봐도 중국인의 외형을 지니며 밖에서 노동하지 않아서 그런지 피부가 새하얘서 로우쏘들과 확연히 구분된다. 참고로 블랙핑크의 리사님이 집이 유복하기는 하나 로우쏘출신이라 태국인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는 것이라고도 한다. 로우쏘에서도 이렇게 전 세계적인 스타가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말이다.


로우쏘 출신이 하이쏘가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사회적 갈등이 극심한 것도 아니다. 종교적인 이유로 내가 로우쏘인건 전생의 업에 따른 결과라고 생각해서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외에도 정책적으로 하이쏘들을 존경할만한 사람들로 포장하고 로우쏘의 우민화를 방치하기도 한다는데 그래서 서민들이 마시는 위스키 가격이 이렇게 저렴한 건가? 그런 생각도 해 본 적이 있다. 물론 최근 MZ세대를 중심으로 왕실에 반대시위를 벌이는 등 변화의 바람이 부는 것으로 보이나 하이쏘가 부를 독점하고 있어 이런 사회 체제가 전복되려면 전쟁 정도는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의 가난이 종교적인 업보라고 생각해서 받아들이는 건 카스트 제도에 아직도 발목이 붙잡힌 인도도 마찬가지다. 인도의 거리에서 구걸로 생활을 이어나가는 카스트의 사람들은 그래서 전혀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그들의 마음에 들어가 보지 않아서 정확히는 모르나 그렇게 보였다)


지금 내가 처한 환경은 업보 때문이고 이 환경에서 벗어나는 건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그냥 환경에 적응하고 굳이 경쟁하거나 싸우지 않고 사바이한 마음 상태로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가는 게 이익일 것이고 그래서 태국에서 이런 특유의 느긋한 문화가 형성된 것일 수 있다.


하이쏘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해도 이 부가 보장되기에 느긋하고 로우쏘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해도 이 가난이 보장되기에 느긋하고.


물론 이건 태국사회에 대한 나의 수박 겉핥기식의 소감이고 사회의 모습은 언제 변할지 모르는 일이다.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태국도 교육열이 높은 나라고 그렇게 교육을 받은 태국의 젊은 세대들은 부모 세대와는 다르게 보다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계급 시스템을 전복시킬지도 모른다.


태국 문화의 분위기가 형성된 이유야 어찌 되었건 나는 이 사바이한 문화를 십분 활용해 몸과 마음을 치유해야 하는데, '치유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집착이겠구나 싶어서 한숨을 쉬었다. 무엇을 해야만 한다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지금 이 순간을 즐기려면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 걸까?


지금 다니는 무에타이 체육관의 수업 방식이 너무 익숙해져서 운동 효율이 떨어지기에 다른 무에타이 체육관을 가보거나 혹은 무에타이가 아닌 요가나 크로스핏도 해보려고 한다. 체육관 마지막날, 하늘은 맑은데 장대비가 30분 넘게 이어졌다. 살면서 이런 순간을 두 번째인가 보는 것 같은데 비가 내리려면 하늘이 흐려야 한다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내가 '진리다,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사실은 그렇지 않을 확률이 훨씬 더 높은 것이다.


마른하늘에 장대비


내가 지금 이 사바이한 문화에 묘하게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면 사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다시 경쟁사회에 복귀하는 것일 수 있고 그건 나쁜 것이 아니다. 혹은 경쟁사회에 너무 오랫동안 몸을 담고 있어서 이 '경쟁'이라는 물을 내 옷에서 빼내는 게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일 수도 있고.


무엇이 되었건 '틀린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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