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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당 Oct 09. 2023

사랑의 모양

#치앙마이 일년살기

오늘은 태국에서 처음으로 미용실에서 머리를 잘랐다. 유럽 어딘가에서 머리를 잘랐다가 쥐가 파먹은 것 같은 머리가 되어본 이후로 미용 실력만큼은 한국을 신봉하고 있어서 타국에서 머리를 자르고 싶지 않았건만 나는 태국 장기거주자이니 다른 방법이 없다.


한국인들이 자주 간다는 미용실을 예약해서 방문했는데 1인샵이었고 남성 헤어 디자이너가 자신이 기르는 고양이와 함께 나를 맞이해 주었다.


미용실 고양이 하루짱, 일본식 이름이라고 한다


그는 자연스럽게 여행 온 것이냐고 묻기 시작하더니, 머리를 감겨주고 잘라주는 몇 십분 남짓하는 동안 내내 거의 쉬지 않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전 세계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 좋아서 태국인 손님들은 안 받으려고 일부러 구석진 곳에 샵을 차리고 예약 손님만 받는다는 그는 굉장히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은 태국인의 연애 스타일에 관한 이야기다. 한국 남성들이 어린 태국 여성들과 연애하거나 결혼하려고 치앙마이를 많이 찾는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한국 여성인 나는 그것을 다소 이상하게 봤고 태국 남성인 그는 많은 나이차이는 태국에서는 별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100%는 아니지만 태국인들은 챙김과 보호를 받는 것이 좋아서 나이 많은 연인을 선호한단다. 이 경우 나이가 많은 쪽이 어린 쪽에게 경제적인 지원까지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남/녀/동성을 불문한 경향이라서 자신의 할머니뻘 되는 여성과 사귀는 어린 남성들도 더러 있다고 한다.(?!!!) 태국인들은 페이스북 그룹을 통해 많이 소통하는데, 나이 많은 남자/나이 많은 여자/특정 체형 등등 다양한 조건의 사람들이 모인 페이스북 그룹이 있고 여기서 자기소개를 올려 짝을 찾는 것이 쉽다고 소개해주었다. 내가 외로워보였나.


그의 설명을 듣고 길예르모 델토로 감독의 'shape of water : 사랑의 모양'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이 영화는 자유로유 연애의 유형에 한 술 더 떠서 말을 못 하는 장애인과 괴생명체 간의 사랑을 다룬다. 영화에서는 물이 굉장히 중요한 장치로 사용되는데 물의 특성이 모양이 없는 것임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멋진 비유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마음은 물처럼 모양이 없는데 사랑의 대상을 만나면 상대방이라는 그릇의 모양에 맞추어 모양이 생긴다. 상대방이 스무 살 연상이건 괴생명체건 원래의 내 마음은 모양이 없기에 내가 원하는 대로 사랑을 하면 되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여주인공이 괴생명체와 함께 그들을 가둘 수 없는 넓은 바다로 향하는 모습이 나오면서 둘의 사랑이 얼마나 넓고 자유로운 것인지 보여준다.


내 마음이 동한다면 어떠한 종류의 사랑을 하는 것도 두려움 없이 직진하는 태국인들의 연애 스타일이 부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이 많은 대상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받는다는 점에서 만큼은, 죽어도 남에게 신세 지기 싫어하는 내 입장에서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긴 했다. 금전이 오고 가는 연애 관계는 정말 물처럼 자유로울 수 있는 관계는 아닐 것 같은데 말이다. 엄마에게 생활비를 준다는 사실만으로 엄마를 자신의 소유물처럼 다루는 아빠를 옆에서 평생을 봤기에 더 그렇다.


머리는 기대 이상으로 마음에 들었고, 저녁에는 일요일마다 열리는 야시장인 선데이 마켓을 찾았다. 저번주에 먹은 파이가 너무 맛있어서 파이 노점으로 직행했다. 선데이 마켓에서만 파는 거라서 파이를 일곱 개쯤 사려는 욕망이 들끓었지만 세 조각만 구매하는 것으로 참았다. 파이를 받아 들고 시장을 둘러보는데 각양각색의 모습을 한 다양한 커플이 눈에 보였다. 지나가는 사람들 중 한국인 커플만 누가 봐도 전형적인 한국인 여자/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다른 나라의 사람들은 저마다 개성이 꽤나 뚜렷했다. 온몸에 타투를 한 여성 커플도 있었고 여성은 100kg쯤 나가는데 남성은 매우 마른 커플도 있었다. 이들은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여행자들 무리에 섞여 내 옆을 지나갔다.


내 욕망의 파이, 세 조각에고작 4천원이다.


미용실에서 연애 이야기를 하다가 헤어 디자이너에게 이런 말을 했다.


한국인들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너무 많이 신경 써.


한국인들은 연애를 하고 관계를 맺어나갈 때 상대방의 그릇의 모양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부모님, 사회의 시선이라는 그릇에까지 맞추어 자신의 마음의 모양을 만들어내야 한다.


한국인이 태국인보다 훨씬 더 많은 소득을 벌어들이지만, 나는 확실히 태국인의 삶이 더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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