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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당 Oct 20. 2023

다음에 다시 오세요

#치앙마이 일년살기

"미안 다음 주에 다시 와야겠어."


이 말을 하는 치앙마이 이민국 직원의 표정에 뭐랄까 안쓰러움이 묻어났다. 나이가 지긋한 직원이라면 이유도 설명 안 하고 당당하게 다음 주에 다시 오라고 했을 텐데 많아봐야 20대로 보이는 이 직원은 이러한 행정처리 시스템을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나에게 미안하다는 공감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상황은 태국에서 교육비자를 받기 위한 과정을 진행 중인 상황이고 비자 신청 과정을 시작한 지 거의 두 달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다. 태국에서 교육비자를 받기 위한 방법은 한국에서 태국 대사관을 통해 신청하여 비자를 발급받고 입국받는 방법과 태국에 입국한 후 한국인에게 주어지는 3개월 무비자를 교육비자로 변경하는 방법이 있다. 나는 두 번째의 방법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치앙마이 대학교 어학원에서 준비해 준 서류를 갖고 치앙마이 이민국에 방문한 시점이 거의 두 달 전의 일이다. 첫 번째 방문에서 이민국 직원은 추가 서류가 필요하다며 나를 돌려보냈다. 어학원을 통해 해당 서류가 준비되기를 기다렸다가 두 번째 방문만에 교육비자 변경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게 끝이 아니라 3주 후 다시 방문하여 여권에 도장을 받아야 했다. 약속된 날에 당당히 이민국 카운터에 도착하니 다음 주에 다시 오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특정 기간에 발급 가능한 교육비자의 숫자가 정해져 있다는데 오늘은 그 할당량이 다 끝났다고 했다. '그럼 애초에 그 수량을 파악하고 다른 날에 오라고 했어야지'라고 생각했지만 사무실 직원에게 뒷돈을 주지 않는 이상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알았다고 하고 물러났다.


치앙마이 대학교 어학원 학생증 발급도 한 달이 걸리는데 비자는 훨씬 더 상위의 업무이니 두 달이나 걸리는 게 당연한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를 달랬지만 뭐랄까 맥이 탁 풀려버려서 뭐에 홀린 듯 근처 쇼핑몰로 향했다. 치앙마이에는 Mr.DIY 라고 한국으로 치면 다이소 포지션인 가게가 있는데 한국에서 다이소 던전을 돌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처럼 Mr.DIY 던전을 한 판 뛰고 나서 빵집까지 들른 후에야 숙소로 돌아왔다. 이민국에 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돌아온 것이 피곤했는지 낮에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가 오후 5시 반이 넘어서야 잠에서 깨어난 참이다.


스트레스성 소소한 소비의 현장, 그래도 필요한 것...만 샀다


한국과는 전혀 다른 태국의 환경은 여러모로 나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좋은 점은 모든 것을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 나 혹은 타인을 압박하는 마음 가짐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압박해 봐야 어차피 빠르게 처리되는 일은 없다. 태국에서의 거의 모든 행정 업무는 서류를 접수하고 나면 서류를 받기까지 기본 2주일씩은 걸린다. 하다못해 숙소 직원에게 무엇을 부탁해도 내일 해준다고 하고는 요청사항을 까먹어 버리기 일쑤다. 태국인들에게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선전포고요 지뢰밭을 터뜨리는 것이라서 내가 죽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 아니라면 기다리거나 포기한다.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최대한 공손하게 말을 돌려 가며 완곡하게 부탁을 해야 한다. 사회생활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기분이다. 한국에서처럼 직설적으로 말을 하려다가도 아차 하고는 말을 부드럽게 할 방법을 고민한다.


나쁜 점은 순응해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어차피 불가능하니 빠르게 포기하는 게 에너지를 아낀다는 측면에서 더 현명한 일이지만 인생 전체로 봤을 때는 과연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차피 안 될 거야라는 생각이 내 성장을 얼마나 방해하고 내 자존감을 얼마나 짓밟는 일인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인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 앤디는 교도소 안에 도서관을 짓기 위해 보조금을 지급하는 기관에 몇 년이고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냈다. 기관은 앤디에게 무대응으로 일관했으나 몇 년이고 지속적으로 편지가 날아오자 마지못해 얼마간의 보조금을 지급했다. 이에 앤디는 만족하지 않고 앞으로는 편지를 더 많이 보내야지라고 다짐한다. 나 말고도 많은 이들이 영화를 보고 기억에 남았을 장면일 텐데 거꾸로 말하면 환경이 잘 갖추어진 사회였다면 앤디가 수년간 이렇게 고생을 해가며 편지를 보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는 보는 이에게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지만 현실에서는 거의 실현되기 어려운 일을 다룬다. 판타지 영화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영화 속 앤디는 희망이 가장 좋은 것이라며 잃지 말라고 말하는데 그래야지 생각하다가도 오늘 같은 날은 지쳐서 침대에 쓰러져 낮잠이나 자고 마는 것이다. 앤디처럼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면 어떤 희망을 위해 내 인생을 투자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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