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송당 Oct 22. 2023

약간 좋아하지 않아

#치앙마이 일년살기

태국어는 나에게 배경음악 같은 언어였다.


이것이 태국어임은 인지하지만 내용은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태국인들이 많은 곳이나 쇼핑몰처럼 계속 광고 방송이 흘러나오는 곳에 가도 시끄럽지 않았다. 백색소음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태국인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한 마디도 못 알아듣는다는 사실은 생각보다는 불편하지 않았다. 영어만 사용해도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옆 자리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듣는 것은 편안하기도 했다. 한국이라면 시끄러운 카페 같은 곳에 가면 옆 자리 사람들이 십중팔구 남의 흉을 보고 있을 것이고 한국어를 알아듣는 나는 그 흉보는 말까지 같이 듣고 있어야 했으니 말이다. 치앙마이에 오기 전에는 삼성역 코엑스의 어딘가를 걷고 있었는데, 나랑 비슷한 속도와 동선으로 걷던 남성 두 명이 나누던 옆팀 여직원을 흉보는 이야기를 5분이 넘는 시간 동안 듣고 있었던 적도 있다. 결국은 걸음을 멈추고 남성들이 멀찌감치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어제 물건을 사러 쇼핑몰에 들어갔고, 광고 방송으로 흘러나오는 말 중에 한 문장에 귀에 확 와서 꽂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마이 쳡 러이~~~


(아직 태국어 글씨를 쓸 수 있는 수준은 아니라 들리는 대로 적었다)


쳡ชอบ은 좋아하다, 마이는 좋아하지 않다, 러이는 조금, 약간이라는 의미이니 마이 쳡 러이~~는 약간 좋아하지 않아라는 의미일 것이다.


마이 쳡 : 좋아하지 않다

마이 쳡 러이 : 약간 좋아하지 않다

쳡 : 좋아하다

쳡 닛 러이 : 조금 좋아하다

쳡 막 : 많이 좋아하다


나는 지금 치앙마이에서 태국어 초급반 1년 과정을 듣고 있고 얼마 전 '좋아하다'라는 단어인 '쳡'을 배우면서 위의 표현도 배웠다. 쇼핑몰 안내방송에서 이 표현을 알아들은 나는 약간은 몸에서 전율을 느꼈다.


미지의 세계의 봉인은 풀렸고 더 이상 이곳에서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즐거움을 완벽하게 누리게 될 수 없게 된 것이다.


태국어 수업이 시작된 지는 두 달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고 간단한 인사말, 숫자 같은 것들은 말을 하거나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일상생활의 대화가 아니라 쇼핑몰에서 나오는 광고 방송을 알아듣게 되니 기분이 달랐다. 태국어를 배우고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강하게 체감되었다.


이제 이렇게 되었으니 숨을 곳은 없다. 어설프게 알아듣는 게 더 싫다. 태국어 수업을 교양 수업 정도로 생각하고 그렇게까지는 열심히 공부할 생각이 없었는데 결국 주말에 공부하려고 카페에 나온 길이다.


사실 태국어 수업을 교양 수업 정도로 생각한 이유는 내가 영어를 제외한 제3 외국어를 과연 배우고 사용할 수 있을까 라는 부담감 때문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완벽주의자의 기질이 있고, 잘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모르는 것이니까 열심히 배우겠다는 생각을 먼저 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결과가 어떨지를 먼저 생각해 버린다. 20대 초중반까지는 그래도 이것저것 잘 시도했지만 30대 중반을 넘어서니 결과를 먼저 걱정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회사에서 성과평가를 너무 오래 받았다. 결과에 따라 평가받는 삶을 너무 오래 살았다.


그래서 이 '마이 쳡 러이~'는 나에게는 하나의 전환점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태국어로 책까지 읽게 되는 날이면 나는 그 이후로는 이 세상에 못할 것은 없다고 굳게 믿게 될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음에 다시 오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