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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당 Oct 25. 2023

나는 반드시 행복하겠다

#치앙마이 일년살기

오늘은 하루 종일 숙소를 청소하고 전구도 갈아 끼웠다. 


숙소는 2011년 즈음에 지어졌을 것이다. 숙소 내 가전제품에 죄다 2011이라는 숫자가 붙어있다. 숙소 내부의 상태는 나름 잘 관리가 되어 있기는 하지만 세월의 흐름을 빗겨가지는 못했다. 벽지는 군데군데 벗겨져 있고 스텐으로 마감이 된 곳은 곳곳에 녹이 슬어 있다. 태국 치고는 비싼 56만 원의 월세를 받는 것은 너무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지만 위치와 뷰가 좋고 최근 한국인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서 몇 달 전에 예약을 해도 방을 구하기 어려운 숙소가 되었다. 지금은 100% 예약이 다 찼다고 한다. 


내가 묵고 있는 방은 작년에 발생한 폭우로 물이 들어와서 마룻바닥과 벽지 일부가 손상되어 있다. 그렇지만 생활을 하고 잠을 자는 기능에는 별 이상이 없으니 숙소 매니저는 이것을 성수기가 끝나고 내년 초에 수리하겠다고 한다. 대신 손상될 곳을 가려줄 덮개 같은 것을 가져다준다고 했는데 그 이후로 2주째 감감무소식이다. 전등도 두 개가 나가서 손봐달라고 했지만 여러 번을 말해도 확인해 주지 않는다. 치앙마이의 성수기 시즌이 다가와서 매니저들이 바빠져서 내 요청을 까먹은 것일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들이 콘도의 소유자가 아닌 단순 직원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업무 성과에 따라 보너스를 받지도 않을 것이기에 딱 필요한 일 말고는 굳이 나의 불편을 열심히 해결해 줄 필요까지는 없다. 태국의 낮은 인건비를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황이며 태국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했다. 


직원들을 강력하게 닦달한다면 내가 원하는 것들을 들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까지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서 그냥 지내고 있었다. 적당한 곳이 있다면 숙소를 옮기려고 알아보고도 있다. 그런데 숙소의 마음에 들지 않는 곳들이 계속 눈에 띄었고 이것이 지금의 나의 행복을 꽤나 방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뜯어진 마룻바닥을 보며, 물때가 낀 화장실을 보며, 얼룩진 벽지를 보며 매일매일 한숨을 쉬었다. 아, 패브릭으로 된 소파는 왜 또 이렇게 상태가 더러운 것인지. 


나는 지금 당장 행복해야 하는데. 그러려고 온 태국인데 고작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시간을 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거실 전구를 사다가 싹 다 갈고 화장실에는 락스를 부었으며 소파는 소파 커버를 사다가 씌우고 선풍기도 분해해서 청소를 했다. 마룻바닥이 손상된 곳은 그 위에 가구를 옮겨 두어서 가렸다.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을 했다.


나는 원래부터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으면 다른 일을 하지 못하는 성격을 지녔다. 조금이라도 잘못한 것이 있으면 강력한 비난을 받으며 자랐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다. 사회에 나와보니 사회도 부모님과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사회생활 초기에는 공문의 줄 바꿈 들여 쓰기 칸 수가 잘못되었다고 감사실 같은 곳에서 전화를 받기도 했다. (거긴 공기업이었다) 정부사업을 많이 담당하다 보니 뭐 하나라도 실수하면 사업 진행이 중단되었고 이 사업에 걸린 몇 억 원 상당의 비용 지급이 늦어질 때도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닦달했고 나는 그게 무엇이 되었건 실수하지 않기 위해 내 모든 감각을 날카롭게 세워둔 채로 일을 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실수를 해도 수정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 그 실수를 바로잡기까지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숙소 컨디션의 경우는 나의 실수는 아니지만 내 마음에 짐이 되는 상황이었고 나는 이 불행에 집착했다.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오늘은 문제 해결을 위해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의도적으로 되뇌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최선이다. 이제 이 채널에서 즐거움이 방송되는 다른 채널로 돌려라. 나는 반드시 행복하겠다.


이건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살짝 고통스러울 정도로 숙소 문제에 집착을 하려던 참인데 그 마음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숙소를 옮기는 그날까지 나는 지금의 숙소에서는 불행을 곱씹었을 것이다. 불행을 곱씹는 것이 실제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불행에 자석처럼 끌려갔을 것이다. 불길이 번져가려던 것을 중간에 잡아냈다. 다행이다, 정말 잘했다.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내일은 계획을 세우고 딱 그 일에만 집중해보려고 한다. 불행을 곱씹을 틈을 주지 않아 보겠다.


웃자, 자기 집인 것처럼 들어와서 자리잡고 있는 이녀석처럼 (체육관에서 키우는 개가 아니라 체육관 옆 사찰에서 키우는 개라고 한다)   
팟타이 한 그릇을 사먹는데 계산하는 곳과 음식을 받는 곳이 이상하게 구분되어 있어서 혼란스러웠다. 옆에서 줄을 선 다른 외국인과 마주 보고 웃어넘겼고 화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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