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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당 Oct 27. 2023

때마침 잘 얻어터지고 왔다

#치앙마이 일년살기

술도 안 마시고, 주 3회는 꾸준히 무에타이 수업을 듣는 중이지만 어째 체력이 좋아지는 기미는 아직이다. 


오늘 무에타이 수업에서 코치와 3분 3라운드 스파링을 하면서 신나게 얻어터진 후, 나는 뭔가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느꼈다. 


무에타이 수업은 오후 5시였고 아침은 거르고 점심 식사는 정확히 낮 12시에 먹었다. 라면에 닭안심과 감자, 양파를 듬뿍 넣어 끓인 식사였다. 푸짐한 식사이기는 했지만 한국에서 한식으로 점심을 먹었다면 그냥 적당한 양이라고 해야 할까. 점심을 먹고 한 시간 정도 낮잠을 자서 그랬는지 소화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몸이 무거운 상태로 무에타이 수업에 들어가니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이 확실히 느껴졌다. 코치와 1:1 미트 훈련을 하는데 평소보다 일찍 주저앉아서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미트 훈련을 끝내니 오늘은 스파링을 하는 날이었고 나보다 족히 열 다섯 살은 어린 남자 코치와 함께 3분 3라운드의 스파링을 했다. (그냥 코치도 아니고 무에타이 선수다) 힘의 5%만 써서 살살하라더니 나와 상대해 주는 코치는 뭔가 신이 나서 나를 상당히 거칠게 몰아붙였다. (아 이 어린 친구여...) 몇 번은 꽤나 세게 얼굴로 펀치가 들어왔는데 머리가 울릴 지경이었다. 안 그래도 오랜만에 하는 스파링이라 감이 없는데 코치는 정말 시합을 뛰듯 강하게 압박하고 소화가 안 되어서 몸이 무거워져 있으니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었다. 발목에 족쇄라도 채워진 것처럼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아픈 것보다 약이 올랐다.


아, 내 몸이라는 기계는 어찌도 이리 예민한 것일까. 나이가 들어서 체력이 떨어진 것은 감안하겠지만 점심 좀 푸짐하게 먹었다고 바로 운동에 이렇게 지장을 주나? 당장 식단을 조절해야겠다고 다짐했고 운동을 끝낸 후 집에 돌아와서도 과일과 요거트, 식빵 두 조각으로 간단히 식사를 해결했다. 평소 같으면 운동 후에도 힘들어서 밥을 과하게 먹었다.


내가 열심히 안 하는 건가? 이런 생각도 들었다. 더 식단을 쪼고 더 운동을 열심히 해야 몸 상태가 나아지는 것일까. 가스라이팅을 당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성과위주의 사회에서 살다가 그게 싫어서 도망쳐온 치앙마이인데 나는 또 나에게 성과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이건 내가 나에게 요구하는 성과고 남에게 강제된 성과가 아니니 받아들여보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스파링을 하면서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못하고 얻어터진 것이 너무도 억울해서 앞으로도 계속 스파링을 하고 지금보다 더 나아지고 싶다.


이런 생각은 지금의 나에게 매우 중요하다. 나는 평생을 살면서 아빠가 되었건 회사가 되었건 혼나기 싫어서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혼나기 싫다는 목표에 너무 매몰되어 있어서 그 이상의 목표에 쉽사리 도전하지 않았다. 딱 내가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에만 집중했고 어려운 일이 닥치면 당황하고 회피했다. 점수로 따지면 100점 만점에 80점대의 점수에 계속 머물렀다. 


오늘 스파링을 할 때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당황스럽고 이 상황을 피하고만 싶었다. 그러다 마지막 3라운드에는 앞선 두 라운드에서 코치가 하던 움직임을 따라 해봤고 한 대 정도는 나도 코치에게 펀치를 집어넣을 수는 있었다. 위빙(몸을 움직여 상대방의 공격을 피하는 복싱의 회피기술)으로 한 번 정도는 펀치도 피했다. 아주 작은 성과였지만 그 느낌은 너무도 좋았다. 


나보다 월등히 잘 싸우는 사람 앞에서 무력하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얻어터지는 절대적 공포와 좌절감. 이걸 나는 조금씩 이겨내 보겠다. 나도 상대방의 움직임을 보고 피하고 상대방의 움직임에 맞춰 카운터 펀치를 넣어보겠다. 


회사생활을 할 때 왜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목표치가 숫자로 주어졌고 성취 여부에 대해 여러 명에게 감시당했다.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과정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를 불러다 면박을 주는 관리자도 태반이었다. 나는 어지간한 목표는 다 달성했는데 방법론까지도 관리자 마음에 들어야 했던 것이다. 이 목표가 왜 중요하고 이 방법이 왜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최적의 방법인지에 대해 나와 대화해 주는 관리자는 없었다. 그래서 더 어려운 목표에는 도전하지 않으려 했나 보다. 성과에 이 난리를 치는데 성과가 제대로 나지 않을 것이 뻔한 목표에 도전하는 것은 내 무덤을 스스로 파는 일이 아닌가. 


무에타이를 잘하고 싶다는 목표는 성취했을 때 나의 신체적 건강에 다다를 수 있고 이것은 나의 삶에 있어서 내가 가장 최우선 순위로 두어도 좋을 만큼 중요한 성과다. 무에타이를 잘하기 위해서는 식단관리, 수면관리 등 몸 관리가 수반되어야 하고 코치와의 스파링 같은 어려운 상황에도 끊임없이 노출이 되어야 한다. 스파링이 어렵다고 피하면 영영 무에타이를 잘 할 수 없게 된다. 목표와 목표 달성을 위한 방법론을 나는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KPI인가. 


앞으로도 내 인생의 모든 KPI를 내가 설정하고 싶다. 무에타이 수업에서 녹초가 되어 돌아왔지만 마음만큼은 너무 기쁘다. 오늘 참 잘 얻어터졌다. 


코치와 진행하는 미트 훈련, 이건 차라리 쉽다. 스파링에 비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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