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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당 Aug 31. 2023

오늘을 산다는 것

#치앙마이 일년살기

과거와 미래를 살지 말고 오늘을 살아


나는 치앙마이에 일 년을 살러 와 있고, 극심한 우울과 불안 증상으로 도착한 지 5일 차부터 매일을 울면서 보내고 있다.


이런 나의 상황을 듣고 친구 K가 말했다. 방법은 간단하다, 과거와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오늘을 살아라. 그게 삶의 궁극의 비기이고 매우 쉬운 방법이다.


'알지, 누가 그걸 모르겠어, 나도 노력하고는 있어, 그게 코딩처럼 코드를 써서 실행시킨다고 짜잔~하고 되지 않는 것뿐이지.'


K의 카톡이 너무 칼 같은 것 같아 조금은 서운한 감정이 들까 싶었지만 이것이 K에게는 나를 위한 가장 최선의 마음, '문제가 있다면 답을 찾아 주는 것'인 것을 알고 있어 이내 그 서운한 감정은 사라지고 나를 위해 노력해 주는 K에게 고마웠다.


그리고, 이 현재를 살아가는 것은 오롯이 나에게 주어진 문제다. 수학 문제의 답처럼 정답은 알고 있는데 이걸 어떻게 실행하느냐(풀어내느냐)의 문제이다. 뇌과학적인 메커니즘은 모르겠는데 우리의 뇌는 왜인지 모르게 인간이 현재에만 집중하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내려고 하는 것 같다. 대체 이유가 뭘까?


요즘 불안과 걱정에 대해 유튜브를 열심히 찾아보고 있는데 누군가는 이런 말도 했다. 불안과 걱정은 인간에게 필요하다. 불안과 걱정이 없다면 인류는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 생각해 보니 그렇다. 만사 태평한 인간은 호랑이에게 잡아 먹혔을 거고 호랑이의 기척이라도 나면 빠르게 인지해서 냅다 도망친 인간은 살아남아 자손을 번창시켰겠지. 나는 굉장히 겁이 많은 편이라 치앙마이에 올 때마다 스쿠터를 운전하면서도 전혀 과속을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사고가 난 적도 없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살아있다. 내가 불안덩어리 겁쟁이인 것이 이런 장점도 있는 것이다.


오늘을 오롯이 살아가기 위해, 오늘은 무에타이 체육관을 찾아가 무에타이를 시작했다. 무에타이는 태국 전통 무술로 쉽게 설명하면 '킥복싱'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킥복싱은 태국 무에타이를 스포츠로 변형시킨 것으로 무에타이의 순한 맛 버전) 무에타이를 하면 내가 나름은 잘하는 운동이라 자존감도 올라가고 너무 힘들어서 눈앞의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현재를 살아가기 딱인 운동이다.


무에타이 체육관에 가면 이렇게 코치와 미트 훈련을 하게 된다

작년에도 한 달간 와서 운동했던 곳인데 코치들이 나를 알아보고 반기며 인사해 주었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이러한 인사가 어찌나 위로가 되는지 깜짝 놀랐다. 잠시나마 소속감이 생긴 기분이었다.


작년보다 살도 더 찌고 매일 울어서 머리도 아프고, 이날 하루도 2만 보쯤 걸은 상태였고, 밥을 너무 일찍 먹어서 아예 속이 다 비워져 있는 최악의 컨디션이었다. 코치들은 내가 1년 만에 무에타이를 하는 것을 이해하고 평소보다 쉬엄쉬엄 운동을 봐주었는데, 그래도 이런 1:1 훈련을 4분 4라운드를 해야 한다. (한 라운드를 하고 나면 한 번 쉬고 다음 라운드를 진행해서 그나마 낫다)


이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눈앞의 코치의 주문에만 집중한다. 펀치를 해라, 킥을 차라는 등의 주문. 숨은 턱까지 차오르고 죽을 것 같은데 마음만은 편안하다. 너무 오랜만에 힘든 운동을 해서 힘들다 못해 배에서는 경련까지 일어났지만 오랜만에 나 자신에게만 집중했다. 좋아, 오늘은 무에타이를 한 것만으로 잘 지낸 날이다.


그렇게 운동을 끝내고 30분 거리를 걸어서 귀가하는데, 방금 전까지 내가 현실에 집중했던 것을 잊고 감정은 다시 과거와 미래로 흩어져 치앙마이 거리에서 울음을 삼키며 걸었다. 또다시 내 인생은 어두운 밤하늘인 것만 같았다.


참고로 치앙마이에서 스쿠터 운전이 가능한 합법적인 면허증을 보유하고 있지만 우울증을 떨치기 위해 매일 2만 보 이상씩 무식할 정도로 걷고 있다.


하필 귀가 중에 주위가 어두워졌고 불안한 감정은 주변의 색온도를 따라 올라오더라


그렇게 걷다가 눈에 딱 들어온 문구.


치앙마이 올드타운에 위치한 어느 카페 벽면


You're not lost, You're here.
너는 길을 잃지 않았어, 너는 여기에 있어(존재해).

지금 이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는데, 이 문구를 벽에 붙인 사람은 어떤 이유에서 이 문구를 선택했을까? 그도 힘든 적이 있었던 걸까?


내가 지금 이렇게 불안하고 우울한 마음 상태가 아니었다면 이 문구를 발견하고 바로 사진을 찍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 문구를 붙인 사람에게 너무도 큰 공감을 했다.


내가 지금 연락을 하지 않고 있는 부모님에게도 이런 공감을 해드렸어야 하지 않을까? 나라도 그랬어야 하지 않을까? 곧장 생각은 이렇게 이어져 버려서 훌쩍거리기 시작했지만.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신의 소설에서 인간은 하나의 소우주라는 표현을 쓴 것을 기억한다. 이러한 소우주가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전우주적인 이벤트라고 한 표현 역시 하루키가 쓴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출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나에게는 이 '전우주적인 이벤트'라는 표현이 강렬하게 남아 내가 사랑이란 걸 바라보는 이상향 같은 것이 되었다.


누가 쓴 표현이건, 인간은 개개인이 작은 우주가 맞고, 이런 인간이 만나서 마음이 통해 사랑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임에는 분명하다.


요즘 불안에 떠는 나에게 매일 대화를 걸어주는 J라는 친구가 있고, 그 친구가 내 마음을 알아주고 대화해 주는 것 역시 전우주적인 이벤트라고 생각한다. J에게는 내가 평생에 걸쳐 다 갚지 못할 은혜를 입는 중이다. 그 친구는 내가 친구이기 때문에 이런 대화는 당연하다고 말해주는데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 이렇게 시간을 할애해 대화해 주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친구 K도, J도 본인들만의 방법으로 나에게 도움을 주고 있고 이런 친구가 존재하는 것은 축복이고 행복이다. 반대로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건 그저 부모님의 우주와 내 우주가 맞지 않는 것 때문이고 이게 오히려 더 흔한 일이다. 부모님과의 관계에서는 전우주적인 이벤트에 당첨되지 않았을 뿐이다. 부모와 자식이라고 무조건 자동적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친밀한 관계일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쳐서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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