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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당 Sep 01. 2023

시스템에서 벗어난다는 것

#치앙마이 일년살기

학교 다닐 때 종종 가던 칵테일 바 이름이 'Thinking inside the box'였던 기억이 있다. 'Thinking outside of the box (틀 밖에서 생각하다, 창의적으로 생각하다)'라는 표현을 쓰는 게 더 멋있을 텐데 아마도 칵테일 바가 지하의 박스같이 생긴 공간에 위치해서 언어유희로 그런 표현을 붙였나 싶기도 하다. 


갑자기 이 칵테일 바가 떠오른 까닭은 Thinking outside of the box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생각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Thinking inside the box가 얼마나 쉽고 편한 일일까.


틀, 제도, 시스템, 관습 등등(시스템이라는 단어로 통일하겠다). 사회생활을 하는 인간은 대다수가 시스템을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간다.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서 넘어서서 시스템에 종속되어 살아간다. 


내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족 역시도 일종의 제도, 시스템이고 가족만큼이나 힘들었던 회사 역시도 시스템이다. 가족 이야기는 많이 했으니 회사에 대해 말해보자면, 회사에서는 회사가 정한 성과지표 시스템에 따라 나의 가치와 존재 이유까지 결정되어 버렸다.  


특히 가장 많이 스트레스를 받은 전직장에서는 OKR과 직원 등급제라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OKR은 쉽게 말하면 KPI(성과지표)인데 미국 실리콘밸리 식으로 더 무서운 자본의 논리를 첨가한 제도이다. KPI를 넘어서서 정말 달성하기 어려운 상위의 목표를 설정하고 이걸 이루기 위해 전력 질주라 하는 논리다. (OKR에 대해서는 많은 해석이 있지만 내가 이해하는 OKR은 이렇다.) 


야구선수 오타니 쇼헤이가 만들었다는 만다라트 표가 유명한 예시인데, 이 표에서 보면 8구단 드래프트 1순위가 최상위의 목표(Objective)이고 이를 위해 실천하는 갖가지 행동들이 KR(Key Results)이다. 애초에 8구단 드래프트 1순위라는 목표가 이루기 극히 어려운 말도 안 되는 목표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해야 하는 행동도 실천이 쉬운 행동들은 아니다. 

오타니 쇼헤이가 작성하고 실천했다는 만다라트 표

구글 같은 대기업에서 OKR을 도입해서 도저히 이루기 어려운 목표들을 이루어냈다고 하고 이걸 뒤늦게 한국에서, 특히 스타트업에서 들여와서 OKR이 뭔지 제대로 이해도 못하고 도입하고 있다. OKR, 참 멋있어 보이지만 극한의 목표 중심 주의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걸 해내면 회사는 제대로 보상을 하나?


내 전직장도 OKR이라고 해놓고 그냥 팀별로 KPI를 설정했으며 그나마 팀별 KPI의 방향성이 통일되지 않고 다 달라서 팀들이 협업하지 못하는 촌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OKR인 척하는 이 KPI를 달성해야 고과점수를 높게 받고 성과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협업은 무슨, 내 꺼 하는 게 더 중요했다. 팀장들은 내껄 하기 위해 다른 팀과 싸웠다. '이걸 우리가 왜 해야 합니까?!' 


여기에 더해서 직원에게 등급을 매기기도 하였는데 레벨 1 ~ 5까지의 등급은 팀장이나 본부장들이 임의로 지정하였고 왜 이 사람이 이런 등급을 받았는지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이러한 바보 같은 시스템은 '회사의 이익'이라는 명목 하에 도입되었고 이 시스템에 맞추어 나를 포함한 직원들은 협업하지 못하고, OKR을 달성하여 높은 레벨을 인정받아 성과급을 받기 위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물론 나는 빠르게 탈출함)


스타트업의 예를 들었지만 일반 회사들에서도 (물론 스타트업은 일반 회사랑 다를 바 없다. 스타트업이라 불리는 회사들 대다수는 브랜딩이 멋있게 된 구멍가게다, 언제 망할지 모르는) 성과제도를 운영하기에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이러한 시스템에 종속되어 살아간다. 


한 동안 이러한 시스템에 속해 개인의 삶을 포기한 일상을 살았다. 새벽까지 일하다 지쳐 잠들고, 아침에 좀비처럼 일어나서 일했다. (재택근무여서 더 심했다. 출퇴근의 개념이 없었다. 오로지 노트북 앞에 앉아서 일만 했다.)


회사 입장에서는 직원을 고용한 이유가 성과를 내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시스템 도입은 당연한 수순일 수 있으나 점점 더 시스템만 존재하고 그 안의 사람은 사라져 갔다. 코로나에 걸려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온몸에 열이 불덩이처럼 나는 상황에서도 회사는 나에게 성과를 위해 일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하여 이러다 죽겠다는 확신 하에 가족도, 직장도 거리를 두고 치앙마이에 온 참이었다. 하지만 시스템에서 벗어났다는 상황은 나에게 자유의 감정 대신 극심한 불안과 우울증으로 돌아왔고 나는 이 상황이 매우 당황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더 그러한 것일까?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기에 시스템에 속해야만 하는 것일까?


누군가 타인의 기대(나는 이것을 시스템의 요구사항이라고 받아들였다)를 무시하고 살기 시작하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하던데 이것은 문자 그대로 칼같이 단번에 실행할 수 있는 것일까? 


오늘은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불안과 우울에서 조금은 벗어난 기분인데 그 까닭은 여기서 나만의 작은 시스템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정해진 시간에 운동을 가고 저녁거리를 어디에서 사서 어떤 길로 걸어서 집으로 돌아올지 결정하였다. 우울증 환자는 정해진 루틴대로 사는 것이 건강 회복에 효과적이라고 하더니 효과를 바로 보았다.


가족과 회사라는 시스템에서 죽을 것 같아 도망쳐 온 곳에서 시스템에서 벗어난 불안감을 느끼다가 나만의 시스템을 만들고 안정감을 (일부) 되찾다니. 나라는 인간이라는 기계의 작동방식은 아직은 온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지금의 가설은, 내 스스로가 나만의 시스템을 더 확고히 구축할수록 자존감이 높아져서 정신건강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오늘은 이러한 힌트를 얻었으니 내일 또 적용해볼 요량이다. 


치앙마이에서...하라는 휴식은 안 하고 이러고 있다. 


23년 8월 말의 치앙마이 소식이 궁금하다면, 우기라는데 비는 별로 안 오고 낮에 매우 뜨겁다. 하지만 올해 여름 한국이 더 죽을만큼 뜨거웠어서 치앙마이의 더위는 견딜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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