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 일년살기
[상황1]
내가 운동하는 체육관에 한국분 몇 분이 오셨는데도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한국인 싫어'와 같은 이유라기보다는 운동 그리고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국분들은 언어가 통해버려서 외면하기가 쉽지 않아서 아예 말을 안 섞으려고 한다. 이 판단에는 잘못된 것이 없으며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나의 자유다.
사실 그중 한 분은 몇 달 전에 다른 체육관에서 마주쳤었고, 나에게 태국어 공부를 같이 해보자고 연락을 주셨던 분인 것 같다. (안경을 안 쓴 상태로 뵈어서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당시는 공황발작이 일어난 지 정말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으로 매일 밤 우울증으로 울던 시기라 그분의 제안은 거절했고 그 방법은 카톡을 읽씹하는 것이었다.
다른 체육관에서 나를 다시 만난 어색한 상황, 그분이 먼저 푸딩을 사 왔으니 먹든지 가져가든지 하세요라고 말을 걸어주셨다. 이때 표정이 다소 굳어있으셔서 내가 예전에 뵈었던 그분이 맞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한차례 거절 의사를 밝혔음에도 또 말을 걸어주신 부분에 대해서는 송구스럽고 감사하다.
하지만 그분은 나에게 '드시겠어요?'라는 권유가 아니라 '먹거나/가져가라'는 옵션을 줬고 여기서 1차로 거부감을 느꼈다. 거절의 옵션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단 것을 먹지 않는다'라고 거절하고는 내 운동을 계속했는데 그 옆에서 그분이 '이거 그렇게 달지 않은데'라고 나지막이 읊조리는 것을 듣고는 거부감은 배가 되었다.
음식이 얼마나 단 지의 사실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중요한 것인데 그분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분에게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름의 소프트한 거절.
[상황2]
연락을 하지 않고 있는 엄마에게 또 일방적으로 연락이 왔다. 연말정산을 해달라는 것이다. 거의 15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엄마의 연말정산 업무 처리는 내 몫이었다. 엄마는 아빠나 남동생에게는 절대로 부탁을 하지 않고 나에게만 부탁을 가장한 명령을 한다. 집과 연락을 끊은 기간 동안도 연말정산만큼은 내치지 못하고 들어주는 중이다.
올해는 연말정산이 매우 간소화가 되어서 엄마의 계정으로 연말정산 사이트에 로그인을 한 후에 연말정산 동의 버튼만 누르면 회사에서 알아서 해준다. 카카오톡으로 로그인 인증요청을 보낼 테니 인증요청 확인만 해달라고 요청하니 엄마는 '나는 이런 거 못한다'라고 한다. (엄마는 노령이 아니고 지난 몇 년 간 카카오톡 인증을 몇 번을 해본 적이 있다) 정말 이런 걸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주니까 배우려는 노력 자체를 하지 않는다.
상세히 캡처까지 해서 방법을 알려주고 못하겠으면 나는 못 도와준다고 선을 그었다. 이렇게 엄마에게 명확히 거절 의사를 밝힌 것은 평생 이번이 두 번째다. 엄마가 무슨 반응을 하건 나는 이번에는 더 확실히 거절을 할 요량이다.
마음이 아주 편하지는 않다. 누군가의 호의를 거절하고 엄마의 부탁을 거절하고. 내가 정말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
나는 거절을 해도 괜찮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고 이것은 내 인생 전반에 걸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부모님은 각자의 방법으로 나에게 자신들을 강요했고 거절했을 경우 처벌이 뒤따랐다.
아빠는 '효'라는 프레임을 사용해 아빠의 말을 따르지 않거나 다른 의견을 내는 것을 '불효'라고 판단하고 신체적/언어적 폭력을 가했다.
엄마는 아빠와는 다른 방법이지만 같은 결과를 야기했다. '너는 딸이니까 내 말을 들어줘야지, 나는 너밖에 없다'며 나의 죄책감을 건드리고 엄마가 원하는 행동을 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닦달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 '거절'의 옵션은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왜 안 해? 너는 이상하고 나빠.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체득된 삶의 방식은 부모님이 아닌 관계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누가 되었건 나는 그들의 기분을 살피고 거절을 했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불편한 상황(처벌)을 두려워했다. 참고 참다가 알코올에 의존하고 우울감에 빠지고 잠도 제대로 못 잤다.
그래도 드문드문 반항이란 것을 해봤고 지금은 완전히 내 모든 힘을 다해 부모님에게 거절 의사를 밝히는 중이다.
거절하면 싸가지 없고 나쁜 것이라면 싸가지 없고 나쁜 사람이 되겠다고 드디어 마음을 먹었다.
정말 기겁할 수준으로 느리지만 천천히 거절의 경험을 쌓고 있다.
처음 거절을 할 때는 손발이 떨리고 잠도 못 잤는데 지금은 약간 불편한 수준인 거면 나도 많이 발전했다.
이럴 때 가장 어울리는 노래가 있어서 추천한다.
'미안해 하나도 하나도 아무것도 미안하지가 않아서 그저 나답게 살아가고픈 것 뿐 o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