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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당 Dec 31. 2023

어렵게 배우기

#치앙마이 일년살기

2023년의 마지막 날, 금주 129일차.


다시 잠을 못 자기 시작했다. 친구가 치앙마이에 2주간 다녀갔을 때는 함께 생활하며 침대에 누우면 바로 잤고 알람 없이도 오전 7시 반에 일어났었다.


친구가 돌아가고 나서는 자기 전 다시 스마트폰을 보기 시작했는데 그 강도를 조절할 수가 없었다. 새벽 2,3시까지 잠 못 들다가 오전 10시에 일어나는 생활을 일주일 정도 지속했다. 무언가를 하겠다는 의욕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중간 강도의 우울감이 지속되었다.


23년의 마지막 날인 오늘만큼은 이 기분을 끊고 24년 1월 1일부터는 기운을 차리고 싶어서 아침을 챙겨 먹고 근처 공원으로 와서 산책을 하고 글을 쓰는 중이다. 공원에 딸린 작은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 마시는데 평소에는 당이 들어간 음료를 피하지만 오늘은 다소 달달한 커피도 시켰다. 우울한 모드에서 벗어나겠다는 나의 의지랄까.


나의 태국 최애 아침식사 '까우만까이(닭고기 덮밥)'


Huai Kaeo Arboretum


지금 앉아있는 공원은 치앙마이 대학교 정문을 지나 도이수텝 방향으로 조금만 오르다 보면 나오는 작은 공원이다. 관광객이라면 도이수텝 사원을 가는 길이라 여길 들를 일이 별로 없는 곳인데 생각보다 괜찮다. 울창한 숲에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서 20~30분 동안 길을 계속 걸으며 사색에 잠기기 좋다.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사이즈의 나무를 보고 있노라면 잠시간 어디 정글 속에라도 들어온 기분이다. 햇빛을 쬐며 숲 길을 걷는 것은 확실히 정신건강에 이롭다는 생각이다.



다시 우울감에 빠져있는 가장 큰 이유는 얼마간 엄마와 연락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확실히 그 영향향을 크게 받았다. 엄마는 연말정산을 해달라는 것과 연말 잘 보내고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를 위해 나에게 연락했다.


연말정산은 내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을 말해주고 그 이외의 경우는 돕기 어렵다고 했더니 엄마가 다른 이에게 부탁해서 끝냈다고 한다. 새해 인사는 '내년도 건강하고 새해 복 많이 받아라 니가 하는 일도 잘 되길 바랄게^^'라는 내용이었다.


엄마와 딸 사이에 이런 연락이야 당연히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싶겠지만 나는 집과의 연락을 끊은 상태다. 아무리 거절하고 거절해도 엄마는 연락을 멈추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게 나를 가장 힘들게 한다. 잘 지내냐는 안부, 새해 인사 같은 것도 내가 연락을 끊기 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내가 집에 오지 않으니 이런 안부 인사가 시작되었다.


내 거절은 엄마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엄마의 불안을 해소하는 게 1순위다. 엄마와의 관계는 나에게 세계 수학 7대 난제보다 더 어려운 문제로 느껴지고 삶의 의욕까지도 저하시킨다.


엄마의 새해 인사를 받고 잠시 엄마의 카톡을 차단했지만 금방 마음이 약해져서 차단을 해제했다. 하지만 이 글을 다 쓰고 나서는 몇 달이라도 차단을 해둘까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혹자는 이런 상황을 두고 '부정적인 서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집, 부모님, 유년시절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없이 똑같은 생각을 반복한다.


지금 내가 다시 그 상황이지만 이번에는 얼마 전 본 유튜브 강의에서 '어렵게 공부해야 한다, 쉽게 해결되는 일은 없다, 그래야 진정한 독립을 얻어낼 수 있다'라고 한 상담사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박우란 상담사 유튜브 강의_부모들에게 느끼는 자녀들의 죄책감


이 말은 나에게 너무도 큰 힘이 되어주는 말이었다.


요즘 무에타이 체육관에서 소위 '콤보'라고 하는 콤비네이션 기술을 배우는 중이다. 다양한 공격패턴을 외웠다가 실전에서 사용하는 것인데 문제는 내가 방향감각이 멍청한 수준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아니면 공간감이라고 해야 할까. 다른 사람들은 한두 번 가르쳐주면 외우는 것을 나는 스무 번은 반복해야 이해한다. 콤보를 배울 때 너무 이해도가 떨어져서 코치님에게 민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니까, '매우 어렵게 배운다'. 그래서 요즘은 수업이 끝나고 나면 남아서 배웠던 콤비네이션 기술을 이해가 될 때까지 혼자 연습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수업이 끝나고 샌드백을 붙잡고 배운 걸 복습하고 간다


지금 내가 마음고생을 하고, 이걸 이겨내려고 노력하는 과정도 '어렵게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무에타이를 할 때 방향감각이 떨어지는 것처럼 일상생활에서는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될 때까지 반복해서 남들보다 두 배 세 배로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도 안 되면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장점을 찾아서 강화하면 되고.


세상에 쉬운 일이 없는 것이 당연한 거다. 쉽게 배우면 쉽게 잊는다.


술에서도 절대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 좌절했지만 129일째 금주에 성공했다. 술을 끊기까지 고통스러웠던 만큼 쉽게 다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24년 새해에도 모든 것이 기적처럼 짜잔 하고 잘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노력하고 고생한 만큼의 결과를 얻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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