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척하는 엄마
코로나 시대를 사는 우리 집구석 풍경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잠이 깬다.
현재 시각 오전 7시 반.
벌써 격리 60일 차다.
내 옆에 자고 있던 7년, 4년 차 된 미니 인간들이 밤새 생체 배터리 충전을 완료하고 부활을 위해 꿈틀대고 있다. 막 깨어난 그들의 얼굴은 이 세상 어떤 것과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빛난다.
"예쁜 내 새끼들....... 하... 제길, 또 하루가 시작됐구나."
그들의 기상을 바라보는 내 머릿속에는 같이 보낼 하루에 대한 약간의 설렘과 좀비들의 부활을 목격한 것 같은 숨 막히는 막막함이 공존한다.
이미 잠에서 깼지만 눈은 뜨지 않는다. 눈을 뜬다는 건 엄마로서 나의 공식적인 출근을 의미한다. 출근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춰 보고자 자는 척 연기를 하면서 동시에 머릿속으로는 오늘은 뭘 먹고, 뭘 할 건지 생각하느라 닫힌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낮잠 시간을 대략 두 시간 정도로 가정하고 일정을 짜보지만 낮잠은 마치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신화처럼 격리 기간 동안 한 번도 그 실체를 경험하진 못했다. 오늘도 보나 마나 낮잠 시간은 없을 거라는 패배의식에 휩싸여 점점 미간에 힘이 들어가고 어느덧 자는 척하는 내 얼굴에는 이따 오후에 겪을 고단함이 미리 한 겹 드리워진다.
최소 밤 10시까지는 불멸할 좀비 두 명이 놀거리를 찾아 방안 구석구석을 탐색하고 있다. 고맙게도 우리 집 미니 인간들은 잠자는 사람은 섣불리 건드리지 않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30분이 지났을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출근을 결심한다.
"얘들아 일어났어? 오늘 뭐하고 놀지? 뭐 먹고 싶어?"
눈을 뜨자마자 엄마 모드로 신속하게 전환하고 니즈 파악에 돌입한다. (미니 인간들이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듣겠나이다)
그들의 요구 사항은 늘 동일하다. '마이쭈를 달라', '어제 보던 영화를 마저 보여달라'
나의 대답도 마치 문장 자동완성 기능을 켜놓은 마냥 토씨 하나 안 바뀌고 똑같다. "아침부터 TV는 안돼, 마이쭈는 아침 먹고 간식으로 먹는 거야."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 형식적인 니즈 파악이
끝나면 주방으로 향한다. 냉장고를 여는 것으로 본격적인 긴 하루가 시작된다.
하루 일상은 씻기기, 먹이기, 놀아주기 크게 이 세 가지로 나뉜다. 나는 이 중에 놀아주는 일이 가장 힘들다. '놀아주기'라는 명사구 자체가 이미 한쪽의 희생을 전제하고 있지 않은가.
요즘 7년 차 미니는 종이 접기에 푹 빠져 있다. 조그마한 입술로 침을 튀겨가며 칼 접는 법, 뱀 접는 법을 설명해주고는 곧이어 실습까지 강요하는 식이다.
얼마 전에는 도마뱀 접기를 하려고 유튜브를 보며 꼬박 세 시간을 매달렸다. 첫째 미니가 아니었다면 난 평생 도마뱀 접기를 검색할 일도, 몇 시간을 앉아 함몰 접기란 것을 연습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최대 비극은 난 이런 것들을 굳이 알고 싶지도 않고 흥미도 못 느낀다는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란 사실이다. 어릴 때도 안 하던 종이 접기가 나이 들어서 좋아질 리 없다. 종이 접기에 열중하는 미니 옆에서 나는 무표정으로 우와 우와, 표정과 목소리가 전혀 일치되지 않은, 업그레이드가 시급한 리액션 AI 로봇이 되어 가고 있다.
집안에 있기가 너무 힘들어지면 동네 놀이터로 산책을 가기도 한다. 두 미니들을 풀어놓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폰을 주섬주섬 꺼낸다. 그리고 잠시나마 내 본연의 자아로 돌아와 오로지 내 마음이 당기는 대로,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온라인 세상을 누빈다. 주위를 둘러보면 나처럼 폰을 들고 억눌려 있던 자아실현의 욕구를 해소하는 부모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엄마~!"
내 휴식의 종말을 알리는 소리다. 그리고 나는 곧 그들의 손에 이끌리어 미끄럼틀 계단을 꾸역꾸역 오르기 시작한다. 그들이 사는 세상으로의 초대이다. 회식 자리에서 팀장님 손에 이끌리어 억지로 스테이지로 끌려가는 말단 사원처럼 나도 놀이터의 메인 스테이지인 미끄럼틀 꼭대기로 올라간다.
그렇게 서른다섯 살의 큰 여자 인간은 작은 미끄럼틀에 몸을 싣는다. '아악!' 제법 빠른 가속도에 찐 웃음을 발사하며 잠시 동심으로 돌아간다. "생각보다 재밌는데?" 정말 내 기대치가 바닥이었던 건지 3m짜리 직선코스 미끄럼틀의 스릴감이 꽤 만족스럽다.
집에 돌아와 욕조 목욕을 하던 미니 인간들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는지 숨이 넘어가도록 깔깔대며 웃기 시작한다. 무슨 얘기를 하나 가만히 들어보면 아무 맥락 없는 똥, 방귀, 오줌 얘기다. 좋은 것은 나누고 싶은 심리인 건지 멀리 있는 나를 꼭 소환해서 똥 얘기를 공유해준다. 그 똥, 오줌 스토리를 듣고 있노라니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때로 횡설수설하는 얘기를 예의상 참고 듣고 있을 때의 기분과 유사하다. 내가 지금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건 썩소밖에 없지만 중요한 사실은 지금 미니 인간들이 행복하다는 거다. 내가 이 긴 하루를 고군분투하며 달려온 이유도 궁극적으로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 아닌가.
주방에서 점심 준비를 하는 동안 간간히 그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소리에 나도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 소리는 내가 지금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을 주는 소리다.
"아 근데 점심 먹고 나면 뭐하지?
역시 하루는 차암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