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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1일 1 계획, 오늘은 생애 첫 스노클링

와이파이 없는 스벅

by 썸머 신

필리핀에서의 첫 월요일


오전에는 한국에서의 루틴을 그대로 유지한다. 아이들은 수학, 영어, 일기 쓰기 등 정해진 공부를 하고 나는 아이들 공부를 봐주고 글을 쓰면서 오후에 뭐 할지 살살 계획다.


2년 전, 어학원 없이 말레이시아 두 달 살기 할 때 너무 개고생을 많이 해서 다음에는 쾌적하게 어학캠프를 이용하리라 맘먹었었는데 이번에도 인연이 닿지 않았다. 거주 기간이 너무 짧은 게 문제였다. 성수기에는 최소 4주 이상 등록을 하는데 내가 머무는 기간은 애매하게 20일 정도다. 단위로도 등록이 가능하긴 하지만 말도 안 되는 가격이라(1주에 150만 원 정도) 상담원조차 실제 그렇게 등록하는 사람이 없는데 (설마) 안내를 원하시냐고 되물을 정도였다. 내가 포기한 어학원의 비용은 대략 아래와 같다.


호텔식 기숙 어학원의 경우(항공비 미포함)

4주 기준 성수기- 인당 대략 540만 원
1주 기준 성수기- 인당 대략 150만 원

자유 살기는 매일 일정을 짜고 사소한 것까지 직접 알아보고 결정해야 하는 부담이 있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말 그대로 자유다. 미리 계획해서 딱딱 들어맞는 여행보다는, 느슨함에서 오는 자유와 변수를 즐겨보자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여행을 면서 검색과 실행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순간의 컨디션과 욕망에 충실하고, 현재 당장 즐길 수 있는 것에 포커스가 맞춰진 진정한'카르페 디엠'여행 아니냐며 정성껏 정신 승리를 이루었다. 1일 1 계획이면 충분하다.


오늘의 1일 1 계획:'바다에 들어가기'


늦잠을 자고 아침 느지막이 검색에 돌입했는데 30분 만에 스노클링 업체 서치, 카톡 상담, 당일 예약을 끝냈다. 제휴 마사지 이벤트가 있길래 같이 예약을 했는데 숙소 픽드롭, 샤워실을 제공해 준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마사지를 같이 예약한 게 신의 한 수였다.

선셋 스노클링 단독투어- 인당 약 4만 원
제휴 마사지 예약 - 인당 약 2만 원(전신/90분)

마사지샵에서 보내 준 밴을 타고 오후 1시쯤 마리바고 선착장에 도착하니 우리가 예약한 J투어 현지 가이드 삼촌들 7명이 배 위에서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단독투어다. 우리 4명 만을 위한 코스와 가이드들이라니 정말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선셋 투어는 단독만 가능하다고 한다.

배에 타자마자 현지 가이드 삼촌들이 아이들을 둘러싸며 물병 세우기 놀이를 하자고 한다. 스노클링 포인트로 가는 내내 최선을 다해 놀아주시는 모습에 고마우면서도 러지실까 걱정이 됐다.

20대 초반의 앳돼 보이는 어린 삼촌은 나랑 언니한테 사진 찍으라며 뱃머리에 앉아서 이런저런 포즈를 연출했다. 열의를 다하는 정성에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온갖 포즈로 사진을 수백 장 찍었다. 그렇게 찍었건만, 안타깝게도 결과물들이 너무 다 오글거리고 맨 정신으로 보기가 힘들어서 나중에 우울할 때 꺼내볼 몇 장만 남기고 다 삭제했다.

삭제된 사진 중 하나

20분 정도 지나서 우리 배는 '힐룽뚱안'이라는 스노클링 포인트에 도착했다. 가장 두렵고 떨리는 스노클링 시간이다. 물이 무서워서 스노클링은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20대 때 나의 한계에 도전해 보겠다며 호기롭게 수영수업을 등록한 적도 있지만, 잠수가 무서워서 결국 배영만 했다.

스노클링 장비만 봐도 숨이 막히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가이드 1명이 1명씩 맡아서 스노클링을 하게 되는데, 나를 맡은 가이드 삼촌이 인자한 미소로 장비를 착용하고 물속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물 공포증이 있어서 그냥 구명조끼 입고 물에 떠 있기만 하겠다고 했더니 삼촌은 계속 장비를 끼라고, 입으로 숨 쉬면 된다고 했다. 아니 그건 저도 아는데요, 물을 무서워해서 잠수 자체가 안됩니다.라고 말을 해도 아저씨는 시종일관 입으로 후후 숨 쉬는 걸 보여주면서 따라 하라고 하셨다. 이까지 와서 스노클링을 안 한다는 건 상상조차 못 하시는 것 같았다. 제가 물 공포증이 있어서 잠수를 못한다고요. 노우! 노우! 암 스케얼드! 워터 포비아!


다급한 절규에도 아저씨 인자한 미소로 후후 입으로 숨 쉬라고 독려하셨다. 나는 팔로 크게 엑스를 만들어 보여주며 결사적으로 내가 가진 어려움을 알리려 했지만, 아저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손에 물고기밥을 쥐어 주셨고, 너무 좋을 거라는 아무 영양가 없는 소리를 하셨다. 그때 알았다. 아저씨는 계속 본인의 일에 충실할 것임을. 나는 결국 스노클링을 해야 할 것임을.


거듭된 권유에 나는 스노클링 물안경을 꼈고 코가 막히자 공포감이 확 들었는데, 아저씨가 앞에서 자꾸 잠수를 하라고 하는 바람에 진심 속으로 쌍욕을 하면서 그래 어디 죽기야 하겠냐며 홧김에 물속에 얼굴을 담갔다. 눈에 물이 안 닿길래 눈도 살짝 떴는데 파란색 물고기 한 마리가 내 코앞을 스치며 훅 지나갔다. 니모를 찾아서의 도리 친구인가. 그 순간부터 감격이 밀려왔다. 바닷속을 두 눈으로 직접 들여다보고 있다니.

아저씨가 나를 포기 안 하고 끈질기게 해 보라고 한 데에는 이렇게 깊은 뜻이 있는 거였다. 분노는 이내 감사로 바뀌었고 그런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아저씨가 아빠 같았다.


바다 표면 아래에는 분주히 살아가는 물고기들이 있었고 그들의 생활터전이 있었고 숲도, 계곡도 있었다. , 이래서 다들 스노클링, 스노클링 노래를 부르는 거구나.. 나의 세상이 조금 확장된 느낌이었다.


쫄보인 내가 잠수를 하니 딸도 용기가 났는지 서서히 얼굴을 물속으로 담그기 시작했다. 역시 아이들은 백 마디 말보다 내 등 뒤에서 많은 걸 배운다.


남의 일인 줄로만 알았던 수중 사진도 찍어봤다.

물고기 밥을 투척했더니 물고기 떼들이 몰려온다.

떼로 달려드니 무서워서 밥만 던져주고 도망쳤다.


30분 정도 스노클링을 하고 배에 올라오니, 선상 위에 가득 별미들이 한 상 차려져 있었다.

망고, 바나나, 옥수수, 밥, 돼지꼬치구이, 신라면 컵라면, 짜장범벅, 산미구엘, 콜라, 생수.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는 음식들이라 조금 께름칙했지만, 그냥 먹었다. 가이드들이 우리가 먹는 걸 지켜보고 있길래 부담스럽고 민망해서 같이 먹자고 했는데 괜찮다며 손사래를 친다.


밥을 먹으니 아들이 큰 게 마렵다고 한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놈의 똥. 먹는 것도 없는데 하루에 다섯 번은 누는 것 같다. 다행히 배 위에는 간이 화장실 부스가 있었다. 아들은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10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한참 뒤에 창백해진 얼굴로 나타난 그는 물 내리는 버튼이 없다고 했다. 저 안에서 혼자 얼마나 끙끙거리며 고민했을지, 가슴이 저렸다. 가이드 아저씨는 '노 프라블럼'이라며 그 특유의 인자한 얼굴로 옆에 있는 두레박으로 바닷물을 가득 길어 올리더니 화장실 부스 안에 팍 끼얹으셨다. 그걸로 끝이었다. 헉, 그럼 저 배설물들은 다 어디로 가는 거지? 바다에 떠있는 배에 상하수도 시설이 있을 리 만무하고, 저렇게 자연으로 내보내는 건가? 나는 저 안에서 스노클링을 하게 되는 거고? 때론 모르는 게 약일 때가 있다.


밥을 먹고 다시 스노클링을 할 줄 알았는데 바로 선상낚시로 넘어갔다. 낚싯대는 없고 그냥 낚싯줄 끝에 미끼를 달아 바닷물에 드리우는 수준이었다.

아이들은 이토록 싱거운 낚시를 좋아라 했고 한 시간 넘게 고기를 잡았다 놔줬다를 반복하며 놀았다.

낚시에 흥미가 없다면 가이드에게 스노클링을 좀 더 길게 하고 싶다고 미리 말해두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다시 배를 타고 돌아가는 길. 점점 해가 저물고 선셋 호핑이라는 이름과 어울리는 노을이 진다. 저 멀리는 그 유명한 제이파크가 보인다. 아무리 봐도 대명 리조트 같다.

저 멀리 보이는 대명 리조트, 아니 제이파크

세부에서의 첫 마사지


도착 때쯤, 몸이 으슬으슬하고 얼른 샤워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마사지를 예약해 둔 덕분에 도보 거리의 마사지 샵으로 걸어가서 바로 핫 샤워를 하고 뽀송뽀송해진 상태로 건식 마사지를 받을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은 가족방에서 마사지를 받았다. 마사지사분들은 한국말로 "아파요?"라고 물어가며 세심하게 강도조절을 했다. 좀 더 마사지가 필요한 부위는 "포커스"라고 말하면 집중적으로 마사지해 준다.

아이들 마사지는 기척도 없이 조용하다. 제대로 마사지를 하고 있는 건가? 눈을 가리고 있으니 확인할 방법이 없다. 한 시간쯤 지나니 딸이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마사지가 끝난 후, 아들은 한 시간 반 내내 깬 상태로 마사지를 받는 게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한 시간 반은 아이들에게 좀 긴 시간인 것 같다.


예약금 2만 원 + 현장 결제 2400페소(현금)


마사지 끝나고 차를 마시고 있으면 마사지사들이 팁 봉투를 한 개씩 앞에 놓고 간다. 나는 팁 문화에 영 적응이 안 된다. 돈을 내는 자체보다 누군가에게 면전에다 대고 서비스 만족도 점수를 매기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한 것이다.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서로 부담스럽지 않게 팁은 마사지비에 미리 다 포함시키고 따로 안 받았으면 좋겠다.


마사지샵 밴을 기다리며, 주변 구경을 하고 아래층 마트에서 저녁 간식을 구입했다.

밤에 출출해서 그랩으로 같은 건물에 있는 테이크아웃 전문 파스타 맛집에서 배달 시켰다.

papa jan's pasta
파스타 2개 730.27페소(18000원)


오늘은 스노클링을 전했던, 인생의 잊지 못할 멋진 하루였다.



오늘의 특이사항


막탄 뉴타운 스타벅스에는 와이파이가 없다.

스타벅스에 와이파이가 없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직원에게 "What?!!" 하면서 정색을 해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었는데. 결론은 아무튼 아래와 같다.


그 무엇도 당연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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