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를 몇 번이나 깨물었을까
세부에 와서 자동으로 생긴 습관이라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수영장 수질 체크를 하는 것이다.
오늘은 물이 탁하지 않은지, 노랗지 않은지, 새로운 물이 유입되고 있는지 살핀다. 체크인 첫날, 수영장 물이 노란색인 것은 충격이었다. 이 레지던스는 수영장 재정비를 매주 월요일에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도착했던 주말이 물이 가장 더러울 때이긴 했다. 공용 수영장이란 게 뭐, 어느 정도는 남의 오줌물이 함유될 수밖에 없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노란색은 선을 넘었다. 유아풀은 월요일이 지나도 몇 일째 노란빛으로 방치되어 있다. 어차피 곧 또 노란색이 될 거니까 포기한 것인가.
오늘의 아점은 테이크 아웃 통치킨구이다. 우리나라 전기구이 통닭 같은 느낌인데 나뭇잎에 싼 밥을 곁들여 먹는다.
통닭 520페소(12500원)
밥 1개 5페소(120원)
양이 은근히 많아서 넷이 통닭 하나를 다 못 먹고 남겼다. 저 잎에 싸인 밥은 굳어서 딱딱한데 살짝 찰기가 있는 모순적인 식감이다. 맛없어서 다 버렸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먹어야 했었던 것 같다.
어제 아들이 하도 불평불만을 달고 살길래, 도대체 뭐가 불만이냐고 물어봤다.
"엄마는 엄마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잖아!"
머리에 망치를 맞은 것 같았다. 나는 내 나름대로 아이들에게 맞춰주느라 많은 부분을 양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들은 정반대로 느끼고 있었다니 완전한 동상이몽의 상황인 것이다. 미치고 팔짝 뛸 만큼 허무하고 짜증이 났지만, 돌아서서 아들의 말을 곱씹어 보니 가뜩이나 집돌이인 아들에겐 집을 벗어난 것 자체가 고난이었겠단 생각이 들었다. 급 각성이 된 나는 통 큰 결단을 내렸다.
"미안해, 오늘 하루는 네가 원하는 대로 보내보자"
그러자 그는 5초 만에 오늘 하루 일정을 브리핑해 주었다. 첫 번째 계획은 집에 있는 거고 두 번째는 유튜브로 고교 야구경기를 보는 거고 세 번째는 피자를 배달시켜 먹는 거라고. 이건 하루 일정이 아니라 니가 혼자 하고 싶은 걸 줄줄이 읊는 거잖아, 다시 성의 있게 짜보겠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혀를 꽉 깨물었다.
그렇게 아들은 오전부터 혼자 방에 남았고 우리는 숙소 수영장에서 놀았다. 2시간 정도 물놀이를 하니 몸이 떨리고, 혼자 방에 있을 아들이 걱정도 되어 방으로 올라갔다. 그는 어두운 방에 누워서 야구를 보고 있었다. 순간, 속이 뒤집어졌지만 다시 혀를 꽉 깨물었다.
“같이 수영하자, 이제 내려와”
“있다가”
“있다가 언제. 벌써 3시간째야”
“알았어 간다고”
아들은 마지못해 수영복을 꾸역꾸역 챙겨 입고 내려왔다. 20분 정도 수영을 즐기다 갑자기 똥이 마렵다며 방으로 올라가서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젖은 수영복 차림 그대로 또 야구를 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오늘만큼은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하기로 했으니 아무 말 말자며 마음을 다잡았지만, 앞으로 쟤를 데리고 여행을 우찌해야 할지 머리가 아팠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고 저녁이 되었다. 아들은 저녁도 집에서 시켜 먹자고 했다. 더 이상은 깨물 혀가 남아있지 않았던 나는 정말 오늘 집밖으로 한 발짝도 안 나갈 작정이냐며 개난리를 쳤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집탈출을 할 수 있었다.
이 매력적인 로컬의 밤공기에 가슴 설레지만, 현실은 아들이 고른 피자가게다.
페퍼로니 피자. 콜라를 양껏 시키고, 얼굴만 한 망고 아이스크림도 먹는다. 원하는 걸 다 먹고 나자 그는 곧바로 귀가를 종용했다.
"이제 집에 가자"
자비가 없는 이 녀석 때문에 딴 데로 새지 못하고 곧바로 귀가행이다. 바깥 구경 좀 하자고 했더니 오늘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한다고 하지 않았냐고 거세게 몰아친다. 그래, 아들아, 이 정도 했으니 앞으로 한동안은 불평, 불만 금지다.
자기 전에는 무비타임이다. 세부 온 이후로 밤마다 영화를 한편씩 본다.
오늘의 영화는 90년대 미국영화 '라이어 라이어'
짐캐리의 전성기 시절이 담겨 있는 코믹영화인데 30년이 다 되어가는 영화인데도 아이들이 재밌다고 깔깔거리며 봐주니 고맙다.
내일은 무사히 집 밖을 나갈 수 있을까? 행여 그러지 못한다 해도 분노하지 말기로, 소리 지르지 않기로 다짐한다. 대단한 무엇을 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 마음을 읽어주면서 소소하고 행복한 찰나의 순간을 만들어 가는 것이 내 계획의 우선순위였다는 것을 기억한다. 훗날 인생의 겨울이 찾아왔을 때 그 추억들이 살아가는 힘이 될 테니까. 이 녀석은 내가 오늘 하루 혀를 몇 번이나 깨물었는지 알까? 몰라줘도 어쩔 수 없고.
오늘도 별일 없이 잘 보낸 하루에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