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감곡성당
방문일자 2023.07.09
흐릿흐릿하고 축 처지는 토요일이었다. 미사는 가야 하는데... 무언가 동네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그런 마음이랄까? 갑자기 서울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지역의 오래된 성당에 가서 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재빨리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성당 리스트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수도권에서 벗어나서 적당한 거리에, 대중교통으로 충분히 갈 수 있는 오래된 성당. 후보가 세 군데로 추려졌다. 춘천 죽림동 주교좌성당, 예산성당, 그리고 음성 감곡성당. 춘천은 볼 것도 많고 닭갈비랑 막국수와 같이 먹을 것도 많아서, 친구랑 같이 가고 싶었다. 그래서 죽림동 주교좌성당은 7월 30일에 친구랑 같이 가서 미사 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다음 타깃은 예산성당. 감곡성당은 아직 미사는 안 해봤어도 이미 가보기로는 2번 가봤기 때문에 예산성당에 더 가보고 싶었다. 바로 코레일톡에 들어갔으나, 예산역에서 용산역으로 오는 열차가 다 매진이었다... 아무래도 휴가철에 하루 전 기차 예매는 무리인가 하던 찰나, 혹시 몰라 부발역에서 감곡장호원역으로 가는 KTX-이음 열차를 조회해 봤더니... 모든 열차가 넉넉하게 좌석이 비어있었다. 확실히 서해안 쪽을 다니는 장항선이 대천 해수욕장도 있고 해서 그런지 매진이 빨랐던 모양이다. 중부내륙선은 딱히 관광지를 지나지는 않기 때문에 매진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것을 깨닫고, 부발역에서 감곡장호원역까지 가는 열차랑 다시 오는 열차 티켓을 예매했다. 혼자 떠나는 기차 여행은 정말 별 거 없긴 하지만 나에게는 소확행 같은 것이다. 생각 정리하기에도 좋고, 멍 때리기에도 좋고, 계획 세우기에도 좋고...
사실 이번 성당 여행의 목적에는 수면 패턴 바꾸기의 목적도 있었다. 종강하고 나서 낮밤이 완전히 바뀌어버렸기 때문에, 다시 이를 되돌려 놓고 싶었다. 어차피 부발역에서 이음을 타려면 집에서 오전 5시 50분에 출발해야 했기에, 그냥 밤을 새운 후에 5시 50분에 집을 나섰다. 여름의 정말 좋은 점은 이 시간에 나와도 아주 환하다는 것이다. 241 버스를 타고 논현역으로 가서, 신분당선을 타고 판교역으로 가서, 경강선으로 환승해서 한참을 달려 부발역에 도착했다. 사실 여기까지가 1시간 40분이나 걸리는데, 부발역에서 KTX-이음을 타고 감곡장호원역에 도착하기까지는 한 15분 밖에 안 걸린다는 사실... KTX-이음은 최신식 열차라 그런지 외부 디자인도 세련됐고, 내부 디자인도 쾌적하고 깔끔했다. 그리고 KTX나 KTX-산천과 같은 기존의 동력집중식 열차와 달리 이음은 동력분산식이라서 그런지, 정차한 역에서 출발해서 속도가 붙기까지의 시간이 정말 짧았다. 그렇게 감곡장호원역에 도착했다. 얼마 전에 신설된 역답게 정말 깨끗하고 깔끔했고,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역에서 나와서 감곡성당까지는 도보로 1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심지어 역에서도 감곡성당과 매산이 아주 잘 보인다는 사실. 감곡면이 복숭아로 유명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듯, 성당까지 가는 길이 온통 복숭아 과수원이었다. 심지어 가정집에도 복숭아나무를 키우고 있어서 신기했다. 이날 기준으로 곧 있으면 복숭아 제철이었기 때문에 복숭아들이 아주 탐스럽게 열려 있었고, 아직 덜 익은 과실이 많긴 했으나 주홍색으로 잘 익은 과실도 있어서 보는 맛이 쏠쏠했다. 복숭아뿐만 아니라, 바람에 춤을 추는 초록빛 논과 진분홍색 접시꽃을 통해서도 여름의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었다. 멀리서도 잘 보이는 성당의 종탑과 매산 정상의 산상십자가는 신비롭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더해줬다. 이날 오전에는 비도 안 오고 바람도 적당하고 흐리기만 해서 사진 찍고 산책하며 여름의 정취를 느끼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마을 골목길로 들어가 조금만 올라가니 금방 성당에 도착했다. 미사는 10시 30분 시작이었는데, 1시간 정도 일찍 도착해서 사람이 많지 않았다. 성당 외부에서 사진을 왕창 찍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10시 20분 정도 되어서 미사 하기 위해 성당 내부로 들어갔다. 바닥이 나무로 된 오래된 성당답게 신발을 벗고 들어가서 슬리퍼로 갈아 신는 정겨운 방식이다. 역시 교중미사여서 그런지 신자분들이 성당을 꽉 채우고 계셨다. 다행히 맨 뒷줄 가운데 의자에 자리가 있어서 앉았는데, 운 좋게도 아름다운 성당 내부를 한눈에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자리였다. 성당 외부도 그렇고 내부도 그렇고 명동성당의 축소판 같은 인상을 받을 수 있다. 미사 시작 직전에 성당 안에 참새 사이즈의 새가 한 마리 들어왔는데, 미사 끝날 때까지 못 나가고 제대 위에서 계속 방황하고 있던 게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개인적으로 순례자 미사가 아니라 일반 교중 미사라서 다른 성당과 차별화되는 감곡성당만의 특유한 미사를 경험할 수 있었던 점이 만족스러웠다. 미사 중간에 성령을 받는 의식이 진행된다던지, 성찬의 전례 때 신자들이 무릎을 꿇고 미사에 참여한다던지, 삼종기도를 마무리하면서 감곡성당의 주보이신 매괴 성모님께 3번 빈다던지...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감곡성당 소속 신자께서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 일정을 교중미사 도중 신자들에게 공지하고 평일 아침에 장례미사까지 집전해준다는 점이었다. 마치 조선시대 교우촌의 정신을 이어받은 끈끈한 신앙 공동체를 보는 듯해서 마음 한편이 따스해졌다.
이곳 감곡성당의 신비로운 내력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부이용(Bouillon) 신부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하고 넘어갈 수가 없을 것 같다. 1896년에 설립된 감곡성당의 초대 본당 주임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이었던 카미유 부이용 신부였는데, 1893년 사제서품을 받자마자 이듬해 바로 조선에 파견되었다. 첫 본당으로 유서 깊은 교우촌이자 신학당이 자리한 여주 부엉골에 부임하게 되는데, 너무 외진 곳에 자리해 있다 보니 본당 이전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장호원에 이르러 산 밑에 대궐 같은 집을 보게 되고 이곳에 성당을 세우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한 부이용 신부는 집주인에게 집을 사려고 시도한다. 문제는 그 대궐 같은 집의 주인이 고종의 황비인 명성황후 민씨의 육촌인 민응식이었다는 것...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 민씨가 이 집으로 일시 피신하기도 한 내력이 있다. 권력과 부가 가득했던 민응식은 엄청난 액수를 부르며 간접적으로 팔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그럼에도 이 땅에 성당을 세워야겠다고 결심한 부이용 신부는 성모 마리아께 다음과 같이 청했다고 한다.
"성모님, 만일 저 대궐 같은 집과 산을 저의 소유로 주신다면 저는 당신의 비천한 종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주보가 매괴 성모님이 되실 것입니다."
심지어 밤에 몰래 민응식의 집 주변에 기적의 패를 묻어버리는 치트키를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그런데 놀랍게도 민응식이 서울로 압송되고 나서 그 집을 의병들이 사용하게 되자 일본군이 불태워 버렸고, 결국 1896년 5월 그 집터와 뒷산을 헐값에 매입하여 10월 7일 본당을 설립하기에 이르는데, 이것이 지금의 감곡성당과 그 뒷산인 매산이다. 그래서 성당의 주보가 매괴 성모님인 것이다. 매괴(玫瑰)는 장미꽃이라는 뜻으로, 로사리오의 중국식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처음에 건립됐던 감곡성당 건축물은 한·양 절충식으로 지어졌다. 정면 3칸, 측면 10칸의 직사각형 형태로 단층 기와지붕을 한 80평짜리 목조한옥 성당이었는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현재의 서양식 고딕성당은 1930년에 신축된 것이다. 현 성당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시잘레(Chizallet) 신부가 설계한 길이 40m, 넓이 15m, 종탑 높이 36.5m의 고딕식 교회건축물이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일제가 성당 뒷산에 강제로 신사를 세우려고 했는데, 이때도 본인의 힘만으로 신사 공사를 막을 수 없었던 부이용 신부는 다음과 같이 성모 마리아께 청하며 몰래 신사 부지 주변에 기적의 패를 묻는 최강 치트키를 발동한다.
"당신께서 주셔서 성당을 지어 봉헌한 거룩한 땅이니, 당신께서 지켜 주십시오."
근데 성모님께서 또 도와주셨는지 신사 공사만 하려 하면 폭우가 내리거나 야생동물이 몰려오거나 인부들이 다치면서 결국 일제가 신사 공사를 철회하게 된 굉장히 신비로운 일화가 존재한다.
프랑스와 일본이 동맹이었기 때문에, 핍박받는 조선인들의 편이었던 부이용 신부는 일제로부터 큰 처분을 받지 않았는데, 2차 대전과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눈치 볼 게 없어진 일본은 1945년 부이용 신부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부이용 신부는 일제에게 성모승천대축일 미사를 드리고 죽게 해달라고 말했는데, 일제가 이를 받아들여 성모승천대축일에 부이용 신부는 칼을 찬 일제 경찰들과 함께 감곡성당으로 돌아와 사형 직전 마지막 미사를 집전한다. 그런데 천주교 신자라면 알겠지만, 성모승천대축일의 날짜는 8월 15일... 그렇다. 1945년 8월 15일은 조선이 해방된 날. 정말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 아닐 수 없는데, 조선이 해방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사형도 없던 일이 되었고 부이용 신부는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 2년간 더 사목 하다가 1947년 사망한 부이용 신부의 유해는 감곡성당 내 벽제대 아래에 모셔져 있다.
감곡성당을 다루는데 루르드 성모상에 대한 얘기 역시 빠져서는 안 될 것 같다. 감곡성당 제대 정면 벽공간에 첨두아치 형태의 얕은 감실을 파고 그 안에 모신 루르드 성모상은 감곡성당의 핵심이자 상징과도 같은 존재이다. 이 성모상은 프랑스의 루르드 성모 발현지에서 제작되어 부이용 신부의 주도로 1930년 감곡성당 제대 정면에 설치되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성당에서는 제대 정면 벽공간에 십자고상을 설치해 놓는데, 왜 부이용 신부는 감곡성당 제대 정면에 루르드 성모상을 설치한 것일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부이용 신부의 과거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부이용 신부는 루르드에서 조금 떨어진 타브르 교구 출신인데,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 함께 루르드를 자주 방문하며 신앙을 키웠다고 한다. 이러한 과거 덕분에 부이용 신부는 매우 독실한 성모신심의 소유자였고, 이로 인해 성당 제대 정면에 루르드 성모상을 설치하게 된 것이었다. 앞서 부이용 신부의 내력을 설명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커다란 난관이 닥치면 항상 성모 마리아께 청하는 부이용 신부의 모습을 통해 그가 독실한 성모신심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6.25 전쟁 발발 후 감곡성당은 남하한 북한군의 진지가 되었다. 그런데 성당 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던 북한군에게 기이한 일들이 계속해서 발생하자, 두려움에 떨던 북한군은 제대 정면의 루르드 성모상이 그 원인이라고 판단하여 성모상을 향해 총을 한 방 쏘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석고로 제작된 성모상이 산산조각 나지 않았고, 이에 6발을 더 쏴서 성모상에 총 7군데의 총상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성모상은 부서지지 않았다. 결국 북한군은 성모상을 직접 부수기로 결심해 제대에 사다리를 놓고 망치를 들고 올라갔는데, 성모상이 눈물을 흘리며 굉장히 환한 빛을 비추어서 놀란 북한군이 땅에 떨어져 겁에 질렸다고 전해진다. 결국 그 사건 직후 북한군은 성당을 뛰쳐나왔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북한군은 후퇴하면서 감곡 주민들을 납북하려 했으나, 모든 주민들은 이미 감곡성당으로 피신해 있었다. 그런데 북한군은 이미 루르드 성모상으로부터 겁을 먹은 상태였기 때문에, 성당 내부로 진입해 주민들을 끌고 가지 못한 채 그냥 후퇴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성모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당한 일곱 가지 큰 고통을 성모 칠고(七苦)라고 하는데, 마침 이 루르드 성모상에 난 총상이 총 7군데였기 때문에, 이러한 기이하면서도 성스러운 사건 이후 이 루르드 성모상은 성모 칠고를 상징하는 성모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특이한 점은 이 칠고의 성모상이 손에 들고 있는 묵주가 일반적인 5단 묵주가 아니라 6단 묵주라는 점이다. 그 이유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루르드의 성모 발현 당시의 상황을 알 필요가 있다. 프랑스 루르드에서 일어난 이 성모 발현은 1844년부터 1879년까지 성모 마리아가 성녀 베르나데트 수비루에게 총 18번 나타난 발현을 말한다. 베르나데트가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에게 묵주기도를 바칠 때, 우선 5단을 바친 뒤 1단만 본인의 구원을 위해서 바쳐도 되겠냐고 묻자 성모 마리아가 허락했다고 전해진다. 루르드의 성모상은 성모발현의 모습에 따라 묵주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보는 모습으로 제작되었는데, 베르나데트가 묵주기도 6단을 바쳤다는 이 일설에 따라 6단 묵주를 들고 있다. 그리고 감곡성당에 모셔진 칠고의 성모상 역시 지금으로부터 100년 정도 전에 프랑스 루르드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에 6단 묵주를 든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재밌는 사실은... 사실 나만 재밌을 것 같긴 하지만... 한국 천주교회는 아직도 이 6단 묵주에 대한 신심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교황청에서 인정한 공식적인 성모 발현이라고 할지라도 6단 묵주에 대한 신심은 사적 신심에 불과하기 때문에 허가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루르드에서 6단 묵주를 팔고 있는 것과 달리 한국에서는 6단 묵주를 만들고 팔지 못한다고 하며, 한국에서 제작된 루르드 성모상들 역시 6단 묵주가 아니라 5단 묵주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다만 앞서 말했듯이 감곡성당 내 칠고의 성모상은 약 100년 전에 루르드에서 제작된 후 감곡으로 옮겨진 것이기 때문에 6단 묵주를 들고 있는 것이다.
교중미사를 마친 후에는 성당 우측으로 걸어 올라가서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성모 동굴에 다다랐다. 루르드의 성모 동굴을 그대로 본뜬 성모 동굴이 2018년 10월에 완성 및 축성되었는데, 성모상 앞에서 성모 마리아께 기도드리기 정말 좋은 곳이다. 이곳에서 잠시 기도를 드린 후, 성모 동굴 뒤편에서 시작되어 매산 능선을 따라 이어져 정상에서 마무리되는 십자가의 길도 바쳤다. 십자가의 길이 매산 능선을 따라 조성되어 있어서 이를 바치려면 약간의 등산이 필요한데, 길이 생각보다 가파르고 길이가 꽤 돼서 약간 힘들었다. 그래도 십자가의 길의 취지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함께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그 취지에는 상당히 잘 부합한다는 생각이 든다. 십자가의 길이 딱 끝나는 지점을 지나자마자 매산 정상이 나오는데, 정상에는 부이용 신부가 성체 강복을 하는 모습의 동상과 높이가 무려 15m에 이르는 대형 십자고상(산상십자가)이 세워져 있다. 십자고상 앞에서 가볍게 묵상을 한 후 왔던 길을 빠르게 되돌아가 성당으로 내려갔다. 왜 빠르게 내려갔냐?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직감이 들었기 때문에...
나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성당에 내려오자마자 굵은 빗줄기와 함께 매우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바람이 말도 안 되게 강해서 우산을 펼치면 우산이 망가지거나 날아가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았다. 그래서 빗줄기가 굵었지만 우산을 펼치지 않은 채로 감곡장호원역까지 뛰어갔다. 성당에서 역까지의 거리가 가까운 게 정말로 다행인 순간이었다. 역에 도착하니 빗줄기가 더 굵어졌다. 사정없이 내리는 빗줄기를 보면서, 비가 내리지 않은 시간대에 성당에 있었던 것이 정말 운 좋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점심시간대인데도 승객이 아무도 없었는데, 아무도 없는 깨끗하고 널찍한 대합실을 혼자 독차지하는 느낌은 뭔가 편하면서도 불편한... 오묘한 느낌이었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KTX-이음 열차가 도착했고, 쏟아지는 빗줄기와 푸르른 논 풍경을 바라보며 집으로 향했다.
이렇게 해서 짧지만 알찼던 감곡성당 나들이가 마무리되었다. 나처럼 가톨릭 신자라면 굉장히 의미 있는 나들이가 되겠지만, 객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가톨릭 신자가 아니어도 감곡성당은 충분히 마음의 안식을 얻기 위해 방문하기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용하고 호젓한 전원마을의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곳이고, 이맘때쯤 방문한다면 싱그러운 여름의 분위기를 느끼면서 탐스러운 감곡 복숭아 열매를 두 눈에 가득 담아갈 수도 있다. 생각해 보니 4월에 방문한다면 복사꽃이 만개한 황홀한 광경을 눈에 담을 수도 있겠다! 또한, 숙연한 분위기에서 생각을 정리하기에도 좋은 장소라고 느낀다.
답답한 도시 생활에 지쳤다면, 혹은 머릿속에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 너무 많아 힘들다면, 이곳 감곡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겨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