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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Dec 31. 2023

이제와서 아버지가 되었다





일년 동안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내게 혜성이 감사 카드를 들고 왔다.

"대학은 어떻게 됐니?"

혜성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서 이미 지겹도록 듣고 답했을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혜성은 눈물을 그렁거린다.

"망쳤어요, 선생님."

더 이상 해 줄 말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지금껏 실컷 울었을 아이한테 아는 것도 없는 내가 이제와서 뭘 하겠다고… 그래도 궁금해서 물었다.

"어느 대학?"

"OO대요."

"괜찮아. 넌 성실하니까, 어딜가도 잘 할 거야."

하나마나한 위로. 담임이 아니라서 아는 게 없는 딱 그만큼의 거리.


나는 대학을 물은 게 아니라 전공이 궁금했는데… 고3이들과 생활은 아이가 어디에 관심이 있는가를 아는 게 기본인데… 나는 전공이 뭐냐고 물어볼 수 없었다. 내 무관심이 들통나는 거 같아서… 언젠가 말했을 지도 모르는데 내가 기억을 못하는 것은 아닐까 자체 검열을 했다.




"국어 쌤. 일 년 동안 감사했습니다."

꾸벅. 뒤를 돌아보니 덩치 큰 남학생 세 명이 서 있다. 한 녀석은 이름도 알고 눈에 많이 익었고, 나머지 두 녀석은 잘 모르겠다.

학교를 옮기면서 감정휴식기를 가졌다. 암치료 이후에 터득한 생존을 위한 나름의 실천 강령이었다. 수업을 위한 말하기 이외에는 침묵했고 습관성 칭찬이나 다독이는 몸짓도 하지 않았다. 교사가 된 이후 가장 말을 적게 한 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이제와서… 인사온 아이들에게 해줄 말이 없다. 쌓인 애증의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가족 구도가 '아버지 대 어머니'로 심리적으로 분할된 상황이라면, 또 어머니가 아버지의 무능력을 탓하거나 원망하며 아버지를 나쁘고 멀고 왜소하게 그려놓았다면, 아들은 남녀 관계에 대한 균형 잡힌 시선과 관점을 키우기 어려워진다. 그 속에서 섬세하고 예민한 면이 있는 남자 아이들은 더욱 깊은 상처를 받는다...

어머니에게 받았다고 생각하는 상처에 대해서는 "왜 그러셨어요?"라고 따져볼 만한 질문거리가 풍성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상처들을 헤치고 살피는 과정에서는 말수가 준다. 모든 질문의 본질이 "왜 그러셨어요?"가 아닌 "왜 안 그러셨어요?"로 향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안 한 것을 따져 묻는 일은 한 것을 따져 묻는 일보다 어렵다. 결국 어머니에 대한 상처와 애증의 감정이 '과잉과 오바'에서 나온 것이라면 아버지에 대한 상처와 애증의 감정은 '결핍과 무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옆에 가까이 붙어 있었기에 입은 상처보다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감정과 욕구를 꺼내보지도 못한 데서 입은 상처는 사실더 깊고 근본적이다.
- 선안남 <혼자 있고 싶은 남자> 중에서


25년 전, 내게 무관심하다고 생각했던 술에 취한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이 재생된다.

"괜찮아. 넌 꾸준하니까…  지금 IMF 시국에 취업 안 되는 사람이 너 혼자 뿐이겠냐."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뭐가 괜찮단 말인가. 나는 하나도 안 괜찮은데. 평소에 아무 표현도 하지 않던 아버지에게 들은 어줍잖은 위로의 말이 나를 화나게 했다. 그럴거면 술이나 작작 마시고 주정이나 부리지 말지. 다음날 나는 집을 나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방에서 뒹구는 딸에게 평소에 무심했던 내가 딸에게 잔소리를 했던 적이 있었다. 딸은 말싸움 끝에 내게 악쓰며 소리쳤다.

"아빠는 뭘 해준 게 있다고 이제와서 이러는데…"

뭘 해준 게 있다고… 이제와서, 이제와서, 이제와서… 너무 늦은 걸까, 이제와서. 다행히 딸은 그 시절 나처럼 감정적이지 않았고 집을 뛰쳐나가지 않았다. 자기 계획과 의지로 당당하게 비행기를 탔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사랑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별반 다를 게 없는 아버지가 되었다.


관계는
여름날 훅끼치는 소나기가 아니라
봄날에 스며드는 가랑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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