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들에게는 일반 사람들에게 없는 세 가지 특성이 있어. 그 첫 번째가 바로 기우제를 지내면서 곧바로 비가 오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는 거야."
"둘째는 비가 내릴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여유를 가지는 것이고."
"셋째는 언젠가 반드시 비가 내릴 것이란 믿음을 잃지 않는다는 거지. 이 세 가지가 인디언들만이 가지고 있는 진짜 힘이야."
결국 이야기는 간단했다. 스스로의 노력에 실망하지 않으며, 당장에 결과가 나타나지 않아도 여유를 가지며 기다리고,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힘을 굳게 믿는 의지가 인디언들이 기우제를 지낼 때마다 반드시 비가 내리는 진짜 이유라는 것이다.
- 이희영 <챌린지 블루> 중에서
고3 담임의 일과는 등교시간 이전부터 시작된다.
학생 카톡: "선생님 정말 죄송하지만, 저 오늘 아파서 병원갔다가 하루 쉬어야 할 것 같아요."
담임 카톡: "그래, 엄마한테 쌤하고 통화하거나 문자 보내라고 하고, 내일 진료확인서 가져와라. 몸 관리 잘하고..."
건조하고 형식적인 문자 교환이 끝나면 연이어 생리결석 쓰겠다는 아이의 문자가 오고, 버스가 막혀 늦을 것 같지만 뛰어가겠다는 나름 기특한 문자가 들어온다. 교직경력 22년 차이지만 결석, 지각, 조퇴하는 아이가 많은 날은 하루종일 몸과 마음이 불편한 건 극복되지 않는다. 삼백육십오일 하루도 지각, 결석, 조퇴하지 않는 아이도 있지만 매일 지각하는 아이가 지각하고, 시시때때로 아픈 아이가 계속 아프다. 나는 학창시절 중학교 3년 개근, 고등학교 3년 정근을 했었다. 무얼 바라고 그렇게 학교를 악착같이 다녔던가하고 생각하면 부끄러운 마음이 밀려온다. 더 이상 성실이 덕목이 아닌 시대에, 학교생활기록부에 '성실'이란 단어를 써 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표현, 개성, 특기, 적성, 특별 등의 개별성을 강조하는 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오늘도 시원이는 배가 아프다고 조퇴를 했다. 평소에 병결석과 조퇴가 잦은 시원이에게 나는 의미심장하게 의심의 미소를 날렸다. 부사관 지망하는 우리학교 몸짱 녀석이 이렇게 자주 아프다니. 시원이를 조퇴시키고 나는 데번 프라이스의 <게으르다는 착각:Laziness Does Not Exist>을 펼쳐 읽는다. 저자는 "2014년에 심각하게 아팠을 때 때때로 나는 내 병을 의심했다. 내가 마음속으로 열을 만들어내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조종해 나를 안타까워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의사조차 내가 말한 만큼 아픈 게 맞는지 의심했다... 그때조차 주변에 걱정이나 끼치는 존재라며 죄책감을 느꼈다. 왜 내게 회복된 만큼 충분한 의지력이 없는지 한탄했다."고 고백했다. 위암 수술을 하고 위가 없어 불편한 나는 지금도 가끔 저자와 똑같이 스스로에 대해 의심할 때가 있다. 나는 다시 생각을 고쳐 먹는다. 시원이는 정말 아프다고, 어쩌면 번아웃이 온 것일 수도 있다고 말이다.
번아웃은 어른이 회사에서나 경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학생에게도 번아웃이 온다는 사실을 아는 어른은 많지 않다. 자신들의 힘들었던 학창시절은 까맣게 잊는다. 의자에 앉아 공부만 하는데 무엇이 힘드냐고, 아빠는 회사에서 열 배는 더 힘들다고, 엄마도 회사와 가사노동까지 스무 배는 힘들다고 묵살해버린다.
지금은 잊혀진 말, '죽음의 트라이앵글'을 기억하는가? 미국의 대입전형인 입학사정관제가 본격 도입되면서 내신성적, 학교생활기록부, 수능시험까지 학생들의 학교내외의 시험 성적은 물로 학교생활 전반으로 평가의 대상이 넓어졌다. 아이들을 경쟁의 족쇄로 채워서 죽일 셈이냐고 반대하던 때가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신자유주의의 거센 파도는 학교까지 경쟁 체제로 집어삼켜버렸다. 경쟁은 학생들의 학교생활 전체에 깊숙이 들어와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교실에서 경쟁의 수레바퀴는 오늘도 힘겹게 굴러간다.
학생들은 내신성적 1차, 2차고사와 수능시험의 잣대인 모의사고까지 합하면 매 월 시험을 친다. 선택교과제가 도입되면서 학생들은 거의 모든 수업을 이 교실 저 교실로 이동하면서 수업을 듣는다. 기본교과목과 다양한 선택과목까지, 한 학기에 학생 개인이 이수해야할 과목수는 대략 일곱 개가 넘는다. 각 과목마다 한두 개의 수행평가가 일정 기간에 몰려서 진행된다. 수행평가가 언제,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실시되는지 스케줄 챙기는 것도 왠만한 꼼꼼함과 부지런함이 아니고서는 감당하기 힘들다. 수행평가는 학교생활기록부에 교과세부능력특기사항에 기록되는 근거 자료가 되기 때문에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다.
교사 한 명이 작게는 두세 개, 많게는 네다섯 개의 과목을 담당한다. 담당하는 학급수는 일곱 학급 이상이 된다. 학급 당 인원이 20명으로 계산해도 교사 한 명이 140명 학생들의 학교생활기록부 세부능력특기사항을 기록해야 한다. 본래 취지는 학생들의 수업 상황을 객관적으로 관찰해서 기록하는 것이다. 쪼개어진 수업, 짧은 관찰 시간, 많은 학생수를 객관적 관찰의 시선으로 기록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모든 수행평가는 학생들에게 결과 기록물을 요구한다. 학생들은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는 보고서, 감상문, 논설문, 발표문 등 엄청난 양의 글을 써서 제출한다. 이 정도로 많은 글을 쓰면 훌륭한 글쟁이가 탄생할 법도 한데 현실을 그렇지 못하다. 이런 근거물로 기록된 학교생활기록부의 세부능력특기사항은 학생부종합전형의 중요한 평가요소가 된다. 시험기간이 되면 선생님이 출제한 문제를 친구보다 한 개라도 더 맞추려는 총성없는 전쟁이 시작된다. 학교내신등급은 의자뺏기 제로섬 게임이다.
다양성의 옷을 입은 교육과정은 학생들을 버라이어티하게 괴롭히는 결과를 낳았다.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단 하루 한 순간도 방심하며 흘려 보낼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 꾸역꾸역 학교일과를 소화했지만 아이들의 일과는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교문 앞에 대기하고 있는 학원 버스에 오른다. 두 번째 일과가 시작된다.
혹시 수능시간표를 제대로 본 적이 있는가? 아침 8시30분에 1교시 시험을 시작해서 오후 4시 37분(5시 45분에 끝나는 과목도 있음)에 4교시 선택과목이 끝난다. 마라톤 풀코스를 4번 뛰고도 남는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학생들은 두뇌를 풀가동시켜 집중해서 문제를 풀어야 한다. 몸을 움직이는 것 못지 않게 두뇌가 집중해서 활동하는 데에도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현재 수능시험은 부모들이 대학갈 때 치르던 학력고사와 수능 초창기와는 차원이 다르게 진화했다. 감히 고3 학부모들에게 제안 드린다. 휴일날 아이를 모의고사 문제 풀게 하고 시험 끝날 때까지 옆에 앉아만 있어보기 바란다. 아이들 번아웃 실체의 십분의 일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지금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가신다면 아이의 스케줄을 소화할 자신이 있으신가요?"
상담하면서 부모에게 가끔씩 되물어 보는 질문이다. 솔직한 부모는 '아니요, 절대로'라고 말하고 대부분은 그냥 웃기만 한다. 얘기나온 김에 좀더 솔직한 질문을 드려보겠다. 살인적인 스케줄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아이가 한 반에 몇 명이나 있을까? 정확하게 숫자로 말하지 못 하겠다.
많은 아이들이 '번아웃' 상태다. 이 상태가 중학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 초등학교 때에 왔는지, 심하게는 그 이전에 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사람마다 스트레스에 대한 내성이 많이 다르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스트레스에 대한 내성이 더 취약하다.
아이들은 학교에 여러가지 이유로 등교하지 않는 방법으로 저항한다. 다음 방법은 수업시간에 잠을 잔다. 수업을 듣고 있어도 입을 굳게 닫고 눈에는 총기가 없다. 이 현상은 게으름이나 무기력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나는 이것을 '학생 번아웃'이라고 부른다.
교사에게 학교현장은 직장이고 회사와 마찬가지로 교사에게도 직장 번아웃이 있다. 교사가 바쁠수록 학생과의 거리가 더 멀어지는 아이러니가 생긴다. 나는 종종 동료 교사들에게 교사는 심심해야 한다고 비약시킨 우스갯소리를 한다. 교사가 심심하리만치 여유가 있으면, 교사는 학생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아이들도 그런 선생님 주변을 맴돈다. 교직은 양심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버틸 수 있는 직업이다. 교사가 게을러서 아이들을 망친다는 걱정은 기우다.
나는 위암에 걸려서 번아웃 현상을 톡톡히 경험했었다. 몸의 회복보다 마음의 회복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아이들 마음 속에 자리 잡은 패배의식과 바닥난 자존감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려야 회복될까. 노오력만으로 퉁칠 수 없는 만만치 않은 현실의 벽이 버티고 있다. 이것이 지금 우리 아이들이 겪고 있는 아픔이다. 이제 제발, 아이들 그만 좀 놔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