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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Mar 16. 2022

끝? 끗!

... 끗을 통과하는 고삼이들에게




S#1. 노력 재능


"잠이 너무 많아요."

"응, 그건 호르몬의 짓이야. 다른 친구들도 다 비슷해. 선생님도 고3 때 그랬어.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


"공부가 원하는 대로 잘 안 돼요."

"안타깝지만 공부가 원래 그래. 공부 잘하는 건 열심히 하기 때문인데, 열심히 하는 것 자체가 공부의 능력이야. 신체 능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운동 잘하라는 이야기랑 다를 게 없어. 열심히 하면 잘할 수 있다는 어른들의 말... 말은 맞는데 정확히 모르고 하는 소리야. 그러니 열심히 노력하지 못하는 자기를 너무 책망하지마."


'노오력'이라는 말의 위선을 까발리고 싶다. 노력하면 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가 모르나? 문제는 그 노력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노력 자체가 능력이라는 말이다. 노력은 견디어 내는 내성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 끈기나 지구력을 말한다. 지구력은 시간이 관여하는 영역이다. 시간을 이겨낸 자만이 지구력을 기를 수 있고, 지구력이라는 능력을 가진 자가 공부를 잘할 수 있다. 이런 과정적 메커니즘을 생략한 '하면 된다'는 말은 위선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바꾸어 말한다. 너에겐 노력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일 뿐이야. 대신 다른 능력이 있을 거야. 이를테면, 주변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능력,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능력, 사물이 내게 하는 말을 듣는 능력, 친구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능력,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나게 만드는 능력,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말할 줄 아는 능력, 타고난 운동 능력이나 뛰어난 오감 같은 능력 말이야. 찾아보면 너무 많아. 노력이 부족하다는 말로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으면 좋겠어.




S#2. ? 아니고, !


시인, 언어를 허투루 쓰지 않는 자


쓰는 자에겐 오직 '끗'의 상태만 있다. 끗은 안온함이나 홀가분함과는 거리가 멀다. 끗은 '첫'만큼이나 위태로운 단어다. 한 끗 차이로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이야기는 과장이 아니다. 끗은 우리를 긴장하게 만든다. 끗은 타협하지 않는다. 끗은 무시무시하고 책임이 따르는 단어다. 끗은 매듭이 아니다. 끗은 파도처럼 밀려와 순식간에 우리를 덮치고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린다.
끝을 갈망하는 이에게 끗이라는 단어를 안겨주는 건 외발자전거를 탄 곡예사에게 저글링을 시키고 불붙은 훌라후프를 통과해보라는 명령일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두려울 것이다. 고독하고 힘겨울 것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끝!'이라 쓰면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주는 선생님은 없다. 살아 있는 한 끝은 영원히 유예된다. 끝은 죽은 자의 것. 그러니 나는 끝이 아닌 끗의 자리에서, 끗과 함께, 한 끗 차이로도 완전히 뒤집히는 세계의 비밀을 예민하게 목격하는 자로 살아가고 싶다. 여기 이곳, 단어들이 사방에 놓여 있는 나의 작은 놀이터에서.
- 안희연 <단어의 집> 중에서


"너, 착하고 배려심 많다는 말이 정말 싫지?"

"네,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는 말이에요."

이미 자신의 진짜 마음과 직면한 적 있는 용기 있는 아이.


"이게 끝인가 싶으면 더 깊은 바닥이 기다리고 있고..."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끝없는 바닥, 바닥... 그 끝은 죽음이죠."

아이가 무심하게 대답한다.

나는 놀라지 않는다. 죽음을 생각해 본 아이구나. 이 아이는 생각보다 강하다. 자신이 왜 이렇게 성장해 왔는지, 자신이 어디로 가야하는지 묻고 또 물으며 여기까지 왔노라고, 무언으로 말하고 있다. 아이는 정확한 눈물의 발화점을 알고 있다. 아이의 눈을 조용히 응시한다.

"쌤도 죽음의 강을 건너왔고, 나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고 믿고 있어. 너도 지금까지 잘 견뎌왔고 내면은 더 단단해질 거야. 틀림없이"


나는 시방 위험한 고3 담임이다.(김춘수 '꽃을 위한 서시' 패러디) 입시전형, 등급컷 이런 거 전혀 모르는 초짜 고3 담임이다. 그것도 교직 경력 20년이 넘는 햇병아리 고3담임. 올해 2월, 딸을 고3 졸업시킨 학부모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열심히 하면 된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국영수를 한 등급만 올리면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면 한 끗 차이로 등급이 밀려나 원하는 대학을 못가는 아이들이 있다고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린다. 이 지독한 경쟁의 모순을 아이들에게 고백하지 못한다. 상담을 진행하면서 자기가 받은 등급이 만족스럽다고 말하는 아이가 하나도 없었다고 말하고 싶어 안달한다. 한 끗 차이로 등급의 숫자가 바뀐다고 말하지 못한다.


한 단계 높은 대학은 너의 인생을 크게 굴절시키지 않는다. 다만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모른다면 너의 인생은 굴곡할 수 있다고 겨우 용기 내서 말한다. 인생은 등급이 아니라 방향이라고 말하면서 등급을 얘기해야 하는 고3 담임을 나는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매일매일 걱정한다. 어쩌면 아이들보다 내가 더 깨어지는 한 해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쩌겠어 가보는 수밖에...


끗, 노름에서 숫자 10을 채우고 남은 숫자. 나는 한 끗 차이로 인생이 결정나는, 위태하기 그지없는, 흔들리는 영혼들의 인생길잡이를 자처한 어설픈 선생이다. 나는 그 무시무시한 책임이 두렵다. 무한히 원점으로만 회귀하고 마는 우리들의 위태로운 대화는 스릴이 있어서 재미가 있다. 고3이 방황의 끝은 아니다. 대학이 행복의 시작이 아니듯이. 우리는 한끗의 외줄타기를 하고 있어 쓰러지지 않을 수 있다고. 나도 너희들도 그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 년 잘 살아보자고 말한다.


선생이랍시고 인생을 다 아는 듯이 말해놓고 퇴근길 아내에게 아이처럼 천진하게 묻는다.

"여보, 나 고3 담임... 잘할 수... 있겠지? 무사히 마칠 수는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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