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은 언제나 비장했다
살아갈수록 삶은
비장보다 해학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 때
짐은 오로지 가슴 속 저울질로 가능하고
당신 생의 질량을 나는 잴 수 없어
내 저울의 긴장 느슨하게 잡아 놓을 수밖에 없다
어떤 것을 올려 놓아도
무게가 해까운
처진 해학의 눈금처럼
살고 싶다
초등학교 6학년 순연한 나의 선언은 운명의 지침이 되어 괴롭혔다. 타인의 고통을 모른 척하지 않겠다고.('자랑스러운 한국인상'시상식을 보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삶을 살겠다"는 글을 써서 발표했던 것 같다. 그때는 그게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어른이 된 나는 교사가 되었다.
문경민의 성장소설 <훌훌>을 읽고 15년 전 희미한 기억이 소환된다.
아이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내 마음 속에 들어온 학생들의 이름은 절대 잊지 않는데, 이 아이의 이름을 내 무의식이 지운 이유를 아직도 잘 모르겠다.) 새 학년이 시작되기 직전 어수선한 2월에 전학온 아이가 있었다. 2월에 전학을 온다고? 전학온 날, 아이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경찰이 학교를 찾아와 담임을 찾았다. 나는 아이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했다. 조용한 교사휴게실에서 얼굴도 모르는 아이에 대해 담임이라는 이유로 경찰에게 취조를 당했다. 전학오기 전 동네에서 친구들과 주인없는 집에 들어가 절도행각을 벌였다고 했다. 냉장고의 술과 음식을 꺼내 먹는 대담함도 장착한 무서울 게 없는 아이들이며, 지금 그쪽 지구대에서 수배령이 떨어진 상태라고 했다. 경찰이 떠나고 처음 본 아이는 순하디순한 얼굴이었다. 3월이 되면 아이를 볼 일이 없을 테니까 생각하며 나는 시간을 견디기로 했다. 그때 나는 초짜 딱지를 갓 뗀 아직은 뭘 잘 모르면서 열정만 넘치는 중학교에 근무하는 젊은 교사였다.
아이는 엄마가 1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아버지는 전화목소리로 만났다. 쇳소리를 내는 쉰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힘겹게 넘어왔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는 거친 숨소리가 섞여 들어서 확인 물음을 하며 들어야 했다. 아버지의 병도 이미 깊은 상태였다. 아이는 당뇨병과 심장병(신장병인지 아이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등 여러가지 성인병과 합병증을 앓고 있다고 했다. 병원을 나와서 집에서 투병 중이라고 했고, 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상태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초등학생 여동생도 한 명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을지 자기도 확신할 수 없다고 했다.
며칠 학교를 잘 나오는가 했더니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퇴근하는 길에 아이가 사는 집으로 찾아갔다. 아버지가 주말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아는 친척이 와서 특별한 장례 절차 없이 다음날 바로 화장을 마쳤다고 했다. 내일은 학교에 나오겠다고 했다. 나는 아이에게 지갑에 들어있던 현금을 있는대로 꺼내어 주고 돌아섰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 아아가 누구인지 알기도 전에, 범죄자에 고아가 되는 순간을 잠깐 함께 했다. 며칠 후 아이는 도난사건 현장에 없었다는 게 밝혀져 무혐의처분을 받았다. 나는 아이의 불행 속으로 깊숙이 휩쓸려 들어가게 될까봐 두려웠다. 아이에 대한 기억은 여기까지다.
세상에 의지할 곳 없이 고아가 된 남매는 복지시설로 들어갔었나, 고등학교는 진학을 했었나,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자퇴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모든 기억들은 삭제되었다. 나의 암수술과 항암치료가 짧았던 그 시간의 기억을 희미하게 지워가고 있었다. 아파트 입구에서 지갑에서 돈을 내주며 무기력하게 돌아설 때 내 뺨을 때리던 마지막 겨울 바람의 냉기를 나는 선명하게 기억한다. 내 앞에 닥친 육체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게 급해서 아이에 대한 구체적 기억들을 무의식이 뭉갰다.
문경민 소설 <훌훌>은 입양아이의 성장기다. 모든 성장 소설의 주인공은 소년소녀지만 인물들은 하나같이 어른의 지혜와 높은 정신 수준을 가졌다. 인물들의 언어는 사춘기 아이의 것이 아니다. 나는 현장 경험이 없는 작가 본위의 설정이라서 소설의 리얼리티를 떨어뜨린다고 성장소설에 불만이 있었다. 작가는 후기에서 "한 아이와 평생을 함께하기로 한 우리의 결심을 대상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자신의 소설에 대한 우려와 기대를 고백했다.
결핍과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는 현실 속 아이들의 마음은 무방비로 부서져서 미숙하다. 세상을 알기 전에 불행과 불합리한 운명을 먼저 경험한 아이들은 그렇게 견디다가 결국 완전히 주저 앉는다. 아이들을 보호할 사회적 장치는 무력하고 현실은 겨울 찬바람처럼 냉혹하다. 내가 교사하면서 경험한 성장이야기의 결말은 모두 비극적이었다.
왜 성장소설은 하나같이 리얼리즘에 등을 돌릴까. 현실은 비극 중에서도 초비극인데 소설에서는 하나같이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성장소설의 주인공은 하나같이 성숙하고 아름답다. 나는 청소년 성장소설의 이 점이 불편하다. 성장 소설은 희망적이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작가들의 강박이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성장소설은 비극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리얼리즘 청소년 성장소설을 써야 한다는 교사 작가로서의 사명감 같은 것이 생겼다.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와 <데미안> 같은 비장한 성장소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