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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Jan 13. 2024

글쓰는 교사의 사명





이제는 몇 가지 조언들만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소설을 맨 앞에 둬야 한다. 그러려면 착하게 살려고만 하면 안 돼. 선의의 이기주의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
- 한강 '아름다운 것들에 대하여', 최인호 선생님 영전에


최인호 선생이 한강에게 해 주었다는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나는 안다. 나는 착하게 살려고 하는가? 착하지도 않고 이기주의자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 어정쩡한 우스꽝스런 자세. 마음은 전혀 착하지 않은데, 몸은 착하게 움직이는 분열된 선악의 자아가 나다. 나를 대충 아는 사람들은 나를 착한 사람으로 보고, 조금 아는 사람은 내안에 도사리고 있는 날카로운 악의 눈빛에 흠칫 놀라 물러난다. 위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싫어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 반대의 모습을 가지고 싶지만 내겐 쉽지 않다.


나는 소설가가 아니다. 작가도 아니다. 글쓰기에 있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매일매일 끄적이고 있다. 글  쓰고 싶은 욕망 하나만큼은 강하다. 작가가 되고 싶다. 소설가가 되는 것이 인생의 최종 목표다. 글을 쓸 수 없는 이유가 늘어간다. 핑계가 늘어간다는 것은  작가에게 있어 핵심 역량이 없다는 얘기다. 주변에 너무나도 많은 무수한 착한 사람과 그들의 노고를 등쳐먹고 사는 악인 사이에 서서 나는 우두커니 관찰만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내가 가장 하찮은 인간이다. 내가 하찮은 이유는 비겁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비겁한 것은 지킬 게 많아서다. 인간이 부릴 수 있는 최후의 용기는 죽음 앞에서다. 그 동안 내가 떠들던 죽음은 모두 관념어의 잔치였다. 아는 아직도 두렵고, 타인을 의식하고, 지킬 것이 많다. 내가 지키려고 하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잘 모른다. 자존, 사랑, 믿음, 감정, 욕망...  




2012년 겨울부터 <소년이 온다>를 쓰기 위한 자료를 읽으면서 나는 내면의 투쟁을 치르고 있었다. 인간의 잔혹함을 증거하는 자료들과, 다른 한편에서 인간의 존엄을 증거하는 자료들 사이에서 나는 분열을 겪고 있었다... 이 소설을 쓰는 일을 거의 포기하려 했던 어느 날, 5월 27일 새벽 군인들이 돌아와 모두를 죽일 것임을 알면서 광주의 도청에 남았던 한 시민군, 섬세한 성격의 야학 교사였던 스물여섯 살 청년의 마지막 일기를 읽었다. 기도의 형식을 한 그 일기의 앞부분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토록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 순간 내가 쓰려는 소설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든 폭력에서 존엄으로, 그 절벽들 사이로 난 허공의 길을 기어서 나아가는 일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어떻게 그들은 그토록 사랑하는가? 그들을 둘러싼 세상은 왜 그토록 아름다우며 동시에 폭력적인가?
그 열두 살의 나에게, 이제야 더듬더듬 나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절망하는 거라고. 존엄을 믿고 있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우리의 고통이야말로 열쇠이며 단단한 씨앗이라고.
- <한강: 디 에센셜> 산문 '여름의 소년들에게'중에서


"신이시여, 왜 나를 학교로 보내셨나요?"

신에게 아주 가끔 묻는다. 교사라는 직업이 나랑 맞지 않다는 생각을 어쩌다 하게 될 때.  


지금 나의 절망에 대해 생각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절망하는 거라면 나는 학교에서 해야할 일이 남아 있다. 거대한 물리적 죽음 앞에서 나라는 개인은 살아났지만, 거대한 시스템 안에 병들어가고 있는 어린 영혼들이 있다. 나는 그것들을 똑똑히 목도하면서 내 밥그릇에 담긴 밥을 삼키며 20여 년을 연명해 왔다. 앞으로 남은 10년은 그 밥값을 갚는 일에 매진할 것이다.


내 교직생활의 초기는 열정의 10년이었고, 아픔과 치유의 10년을 지나, 남은 여정은 공존의 10년으로 나아갈 것이다. 절망의 깊이가 사랑한 결과라면, 고통은 글쓰기의 연료다. 한강 작가의 말을 절망과 고통이 맞서 싸울 상대가 아니라, 함께 가야할 동반자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그나마 내겐 위안이다.




"여보, 오늘 도서관 하부루타 수업에서 글을 열심히 쓰는 OO고 여학생을 만났어."

"아, 그 학생 나랑 학교에서 만났다면 좋았을 텐데."

"안 그래도 당신 생각이 나더라고."

"생각해보니 이전 학교들에서 아이들과 글쓰기반과 동아리 운영하면서 그런 아이들 한 명씩은 꼭 만나왔어."

학교이야기 저작 아이템과 목차를 아내에게 보여줬다. 내가 가장 많이 알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쓰고 말 할 것이다. 내가 경험해서 조금 알고 있는 학교를, 그나마 잘 할 수 있는 글쓰기의 방식으로 타인과 공유할 것이다.


'어떻게 그들은 그토록 사랑하는가? 그들을 둘러싼 세상은 왜 그토록 아름다우며 동시에 폭력적인가?' 한강의 문장이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깨운다. 나는 왜 이토록 아이들을 사랑하는가? 아이들을 둘러싼 세상은 왜 그토록 찬란하면서 비장한가?  교사로서 나의 절망의 이유는 내가 이 직업과 아이들을 심하게 짝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 시절 순수했던 나와 이 시간 내가 만나고 있는 착한 영혼들을 위해 나는 아직 해야할 일이 더 남아있다. 그러니까 지금 나의 고통이야말로 너희들을 위한 사랑의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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