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지수가 정말로 더는 못 하겠다 싶었던 순간, 아니, 어떤 생각조차 들지 않았을 때, 그제야 영민 씨는 "그만"이라고 외쳤다.
그때 영민 씨가 말했다.
"한 세트만 더 할까요?"
할 수 있다. (언제부터 지수는 영민 씨의 이런 말이 예언처럼 들렸다.) 이건 할 수 없다.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지수는 운동선수가 아닌 사람도 부상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지수는 영민 씨와의 대화가 좋았다. (자신에게 관심이 집중되니까 좋았다.) 영민씨가 말하는 지수는 나아지거나, 나아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 강화길 소설 <풀업> 중에서
조력자
헬스는 조력자가 필요한 운동이다. 근육에 상처를 내기 위해서 자기 한계치를 넘어서야 한다. 혼자서는 할 수 없다. 헬스에서 육체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자기 믿음은 어디까지나 착각일 뿐이다. 근육의 한계는 물리적이므로 속일 수 없다. 딱 거기까지가 맞다. 그것을 무시하고 혼자 극복하려고하다가 몸이 다친다.
으으으... 이게 마지막이야 더 이상을 할 수 없어, 하는 순간에 트레이너가 외친다.
"자, 지금부터 세 개만 더!"
이제 세 개만 하면 끝난다. 젖먹던 힘을 짜내서 세 개를 해낸다.
"자자, 마지막 두 개!! 할 수 있어요!!!"
마직막 두 개다. 근육이 후들후들 떨리고 제어가 되지 않는다. 트레이너는 손가락 하나를 받쳐 도와주는 시늉만 한다. 그 시늉이 무게를 가볍게 만들었다고 착각하며 두 개를 완수한다.
"자자자, 진짜 마지막 한 개!!!"
이제 더는 못 들어올린다는 걸 트레이너는 안다. 트레이너는 힘을 완전히 풀리는 사고를 대비해 양 손으로 적극적으로 무게를 덜어준다(트레이너는 훈련자가 완수할 수 있는 힘의 부족분만큼만 도와준다. 이때 힘의 균형점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트레이너가 개입한 최종의 6회부터 헬쓰가 시작된다. 근섬유는 이때부터 상처를 내며 끊어진다. 무게와 횟수를 늘리는 게 헬스의 목적이 아니라, 근섬유에 상처를 내는 것이 헬스의 목표점이다. 혼자서 헬스장을 몇 년을 다녀도 근육에 변화가 없는 이유는 조력자가 없어서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몸이 정말 빠르게 잘 만들어져요. 웨이트가 체질이신데요."
젊은 시절, 나를 지켜보기만 하던 트레이너가 6개월만에 건낸 첫마디였다.
듣기 좋으라는 말이란 걸 알았지만,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내가 웨이트 트레이닝에 잘 맞는 사람이라고?
"정말 성실하시네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운동하시는 걸 보면..."
혼자서 꾸준히 성취하는 타입이 헬스에 맞다는 뜻이고, 이제부터 조력자가 필요하다는 말이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식욕과 미각
헬스는 굶는 운동이 아니라 먹는 운동이다. 먹어야 에너지를 내고 힘을 쓴다. 힘을 써서 근육을 단련시켜 몸을 아름답게 만든다. 헬스는 정확하게(식이에 관해서 더 정확하게는 사람과 상황마다 다르니 트레이너의 도움을 받거나 공부를 해야한다) 먹어야 한다. 다이어트를 목적으로 한다면 산소로 태워없애야(유산소) 한다. 잘못 먹어서 잉여로 축적된(대부분 탄수화물, 지방의 과다 섭취) 것들만 없어도 헬스의 반은 성공했다. 영양의 잉여가 시각적으로 드러난 것이 비만이다. 잉여만 없다면 운동하지 않아도 모든 인간의 몸은 자연 상태로 충분히 아름답다.
식욕은 허기가 아니라, 미각 때문에 생긴다. 왕성한 식욕은 미각의 쾌락에 지배 당했다는 뜻이다.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모두를 동물에게 우위를 빼앗겼지만 인간만이 유일하게 예민하게 발달시킨 감각이 미각이다. 미각은 인간에게 축복이면서 저주이기도 하다. 항암약 때문에 미각이 죽은 상태를 경험한 적이 있다. 기억으로 음식의 맛을 재생하면서 먹었다. 기억은 감각을 털끝만도 대체하지 못했다. 맛을 못 느끼며 음식을 먹는다는 건 지옥이었다.
근육을 만들기 위해서는 근육을 만드는 영양성분(잘 알다시피 주로 단백질)을 먹는 것으로 섭취해야 한다. 음식물 속에 들어있는 것만으로는 근육을 빠르고 크게 만들 수 없다. 그래서 필요한 영양성분을 집약적으로 모아놓은 보충제를 먹기도 한다. '네추럴' 근육이냐, '보충제' 근육이냐는 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생존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헬스는 그 자체가 인공이다.
나르시스의 유희
헬스는 나르시스의 유희다. 헬스 후 근육이 펌핑된 상태로 샤워실에 들어가는 시간이 제일 행복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을 보고 또 본다. 헬스는 자신을 거울 앞으로 계속 데려다 놓는다. 현재 몸이 객관적으로 아름답지 않아도 상관없다. 내 몸이 변하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한다. 변화진행형, 변화가능성의 도파민에 취한다. 몸의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데는 끝이 없다. 연못에 비친 자기 모습을 사랑하다가 물에 빠져 죽는 나르시스 이야기는 단순한 신화가 아니다. 자기애, 자아도취, 욕망에 관한 상징이다.
자존감이 가장 높을 때를 두 가지 꼽으라면, 연애할 때와 자기 몸이 가장 아름답다고 느낄 때이다. 연애는 정신의 자기애가 충족되며, 몸만들기는 육체의 자기애가 충족되는 경험이다. 인간에게 자기애가 마르면 죽고 싶어진다. 반대로 자기애에 도취되면 스스로를 죽인다.
자존감이 바닥을 칠 때, 헬스장으로 가라!
심란한 마음을 정리해주고, 자신을 거울 앞에 서게 만든다. 거울 앞에 선 자신을 보는 것만으로도 자존감 회복은 시작된다. 변화가 시작된 자신의 몸을 눈으로 보면서 그동안 방치했던 건강한 자기애가 조금씩 자라난다. 몸을 사랑하면 마음도 사랑스러워진다('마음을 사랑하면 몸이 사랑스러워진다'는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우선 순위로 봤을 때 몸이 먼저다. 몸은 즉물적卽物的이기 때문이다).
헬스는 건강한 자기애의 끝판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