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간 지수는 운동에 열을 올렸다. 영민 씨가 말한 '자극점'을 느끼려고 노력했다. 캐틀벨을 내려놨다가 들어 올리는 순간, 엉덩이와 허벅지가 스트레칭이 되는 시원한 통증. 지수는 그 자극이 좋았다. 꽤나 즐기게 됐다... 그 자극은 그녀의 몸을 다른 방식으로 깨워줬다. 그래. 꿈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말이다.
매일 새벽 지수를 집 밖으로 나가게 만드는 건 바로 그 감각이었다. 아주 조금이나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기분.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뿌듯함.
삶의 다른 것도 그렇게 변할 수 있을까?
근질이 좋아졌다. (처음에 지수는 근질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조금 더 집중해라.
- 강화길 소설 <풀업> 중에서
자극점에 집중
헬스는 자기집중의 운동이다. 무게를 드는 순간에 근육의 어느 지점이 힘을 받고 있는지에 집중해야 한다. 자극점에 신경을 집중하는 것을 놓치면 헬스 운동은 실패한다. 횟수와 무게만 늘린다고 몸이 만들어지지 않는 이유이다. 초보와 고수의 차이가 여기서 갈린다.
가령 벤치프레스를 할 때 가슴과 팔의 삼두에 힘이 들어가고 있는 이미지를 계속 그리고 있어야 한다. 뇌는 이미지를 인식하고 그 부위에 집중적으로 에너지를 모은다. 쓰지 않는 근육들과 다른 잡다한 에너지 소모는 줄이며 최대의 효율을 끌어올린다. 이때 무게와 횟수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근육의 움직임과 힘의 집중에 몰입한다. 완벽하게 운동이 되고 있는 상태이다.
생의 자극점을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삶은 조금씩 전진한다. 최초 무無의 상태에서 특이점이 우주빅뱅을 일으켰듯이, 삶에서 무기력에 빠졌을 때 '자극점'은 생의 활력으로 폭발한다. 헬스장을 처음 찾는 이들은 무기력한 삶에 자극점을 찾기 위해서 온다. 헬스는 자극점을 놓쳤다가 찾아가고, 놓쳤다가 다시 찾아가기를 반복하는 운동이다.
밀당의 역학
근육은'당기는pull 근육'과 '미는push 근육'으로 나뉜다. 하나의 근육 부위가 밀거나 당기는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지 못한다. 둘은 완벽하게 나뉘어져 있으면서 동전의 양면처럼 앞뒤에 붙어있다. 팔의 이두근과 삼두근, 다리의 이두근와 사두근, 복근과 등근, 대흉근과 광배근... 몸은 하나의 우주처럼 인력引力과 척력斥力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당기는 근육은 작고 섬세하다. 큰 조각 안에 더 작은 조각으로 나뉘어져 있다. 균형감과 세밀한 운동 기능에 관여한다. 끌어당기는 힘이 작용하는 범위는 좁고 한정적이다. 끌어당기는 힘에는 중심점이 있다. 끌어당기는 힘은 그것이 미치는 영향력 안에 있을 때 유효하다. 끌어당기는 힘은 무한대로 수렴할 수 없다. 중심점으로 수렴하는 힘은 결국 자기를 파괴한다.
미는 근육은 당기는 근육보다 더 큰 무게를 감당한다. 미는 근육 조직은 크고 웅장하다. 외부로 향하는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근육이다. 미는 근육은 거리감과 확장감을 만든다. 외부로 향하는 에너지에 관여하는 근육은 세밀함보다 거침없이 내뿜는 힘power이 중요하다. 미는 근육은 원초적인 욕망의 에너지를 대변한다. 밀어내는 힘은 분출과 배설의 쾌감을 선사한다.
자연과 인공
자연 상태에서 몸은 노동으로 만들어졌다. 채집사냥시대에는 달리고 던지고 찌르고 들고 운반했다. 농경시대에는 굽히고 펴고 들고 나르고 밀고 당기면서 음식을 얻었다. 육체 노동 시대에 몸은 아름다움보다 기능이 중요했다.
육체 노동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몸은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육체 노동이 사라지면서 몸은 인위적으로 움직임을 만들어내야 한다. 돈을 지불하고 근육의 움직임을 강제로 만든다. 헬스는 몸을 미학적으로 바라보는 도구이다.
인공적으로 강제한 몸의 변화는 극적이다. 극적인 만큼 몸은 스스로 학대하고 소외시킨다. 몸을 인위적으로 못살게 굴어야 자신의 몸이 미적으로 완성된다고 믿는다. 극단적 다이어트와 몸의 방치 사이에서 몸은 쉽게 망가진다. 몸의 방치는 필요할 때(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원상태로 돌려 놓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서다. 극단적 다이어트로 몸을 극적으로 변화시켰을 때 놀라는 타인의 시선을 즐긴다. 몸은 기능이 아니라 미적 대상으로 전락했다. 헬스는 몸을 자연에서 인공으로 데려다 놓았다. 헬스는 나르시스트의 놀이로 변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