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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Jan 21. 2024

상처 돌보기

꿈해석 에세이





꿈 제목 - 교사 상처
꿈 이미지 - 교실, 권위, 오해, 삐딱선, 화, 빌가벗음, 도움, 거절, 끝나지 않은 상처 치유
꿈 감정 - 화기, 폭발, 두려움, 오해, 부끄러움, 상처, 태연, 당당, 불안,

소란한 교실. 나의 말은 꼬인다. 아이들은 서서히 삐딱선을 타기 시작한다. 나의 화는 서서히 부글거리며 올라온다. 드디어 터진다. 머리를 빡빡 민 아이는 멈칫하연서 굽히지 않는다. 이른바 교실에서의 힘겨루기가 시작 된 것이다. 아이들의 반항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다. 저네들을 숨막히게 하는 세상을 향한 저항이고, 자신의 의지대로 통제되지 않는 불완전한 마음에 대한 신경질이다. 그런 반항을 나는 나를 향한 것으로 오해한다. 순간 나는 권위로 가득찬 세상의 표상으로 우뚝 선다.
교탁 앞에 선 나는 발가벗었다. 사각 팬티로 중요 부위만 가렸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당당한 척, 강한 척하지만 불안하고, 부끄럽고, 나약하다. 교실 앞문 안으로 벗겨진 나의 옷가지를 내미는 도움의 손이 쑥 들어왔다. 나는 옷을 받아들었지만 입어지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벗은 채로 나의 화를 삭이고 있다.




공포

학교 꿈을 자주 꾼다. 현실의 나는 교사인데 꿈속에선 종종 학생으로 교실에 앉아 있다. 꿈속에서 나는 시험을 치고, 시간에 쫓기고, 막연하게 두렵다. 계속 시계를 본다. 시계 바늘과 눈금은 뭉개져 있지만, 시간은 늘 나를 재촉한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문제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학교는 언제나 쫓기고 두려운 공간이었다.

학창시절 나는 왜 그토록 학교가 무서웠을까?

새 학년이 시작되는 3월이면 학교에 가기 싫었다. 성적, 무거운 자의식, 자존심, 열등감, 폭력, 규칙과 억압, 읽히고설킨 관계의 집합체...

특별히 무서운 선생님도 나를 괴롭히는 친구도  없었는데 학교는 내게 공포의 공간이었다. 학생 때는 선생님이 무서웠고 선생님이 되어서는 학생이 무섭다.


학생으로 16년, 교사로 20년. 학교에서 내 생의 대부분 시간을 보냈다. 나의 정체성은 학교에서 만들어졌다. 무언가를 배우고, 누군가를 가르치는 곳. 가르침과 배움은 분리되어 있지 않고, 그 틈 바구니에서 갈팡질팡했다. 배움에 목말랐지만 학교에서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다. 좋은 가르침을 주기 위해 동분서주 할수록 그것과는 멀어졌다.


나는 태생이 초식 동물이다. 강해져야 한다는 강박이 나를 괴롭힌 적이 있었다. 초식동물은 고기를 먹을 수 없는 법이다. 초식동물은 예민한 감각으로 살아간다. 예민한 감각과 따뜻한 감성은 꽤 쓸만한 생존 방식이란 걸 교사가 되고나서 알았다. 정신이 예리하게 벼리어진 아이 시절이 더 건강한 상태였다. 지금 내가 아이들에게서 느끼는 두려움은 이것이다.




상처

부끄러운 직업적 영업 비밀 하나. 교사들의 대화 자리에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학생이야기는 단골 메뉴다. 회사원들이 그들을 힘들게 하는 동료나 상사를 안주 삼는 것처럼. 젊은 교사 시절, 우리들 존재 이유가 그런 아이들 때문인데, 이런 자리에서 굳이 아이들을 뒷담화 소재로 끌고 오는 건 무슨 심리일까 불편했다.


"아, 나는 스스로를 돌보지 못했구나."


위암 수술 후 병실에 누워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방치된 아이들 돌보느라 정작 나를 방치했다. 나는 '보람 중독자'였다(스스로 훌륭한 교사 코스프레 하는 것 같아 부끄럽지만, 교사 상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많은 교사들이 이런 위험한 상태에 빠져 있다는 걸 알리고 싶은 의도). 인간은 공감의 동물로 진화해 왔다. 인간은 누군가의 위안이 되기를 갈망한다. 교사들은 '공감 DNA'가 유독 강한 사람들이다.


발설하지 못한 상처가 내 안에서 암으로 단절을 선언했다. 교사들은 각자의 깊은 상처를 품고 그렇지 않은 척 분투한다. 교사는 어른이고 강자이기에 어디에도 내어 보이지 못하는 우리들만 아는 상처가 있다. 어떻게든 함께 어루만져야 하는 절박한 동료의식이다. 부모도 어쩌지 못하는 상처받은 아이들의 마음을 어르고 달해는 것이 교사의 사명이라 믿는다. 교사 상처는 발설되어서는 안되기에 자기 안으로 파고들어 스스로 생채기를 낸다는 점에서 자기 파괴적이다.




인연

학교는 관계의 밀도가 가장 높은 공간이다. 어린 아이부터 중년에 이르는 어른까지, 세대와 성별을 아우른다. 관계는 일시적인가 하면 지속성이 있고, 끝인가 싶으면 계속 흐르고 이어진다.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 어떤 상황에 만남의 불꽃이 발화 되느냐에 따라 화마가 되기도 하고 영혼의 발화점이 되기도 한다. 나는 교사라는 직업의 매력을 꼽으라면 이것이라고 말한다.


학교라는 공간은 고정되어 있지만, 그 안을 채우는 내용물은 계속 흐르고 바뀐다. 흐름과 이동의 장에서 만나게 되는 인연의 찰나는 영원으로 채워진다. 교사는 특이한 인연 업장을 타고 난 사람이다. 한꺼번에 이렇게 많고 질긴 인연의 윤회 속에서 살아가는 업장의 두께를 가늠한다.


이제서야 조금 물러나서 기다릴 줄 아는 교사가 되었다.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의 거리를 헷깔리지 않을 수 있게 유지할 수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상처를 내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공간감과 기다림의 시간이 주는 여유를 즐길 줄 안다. 무엇보다 나는 자기 상처를 돌볼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게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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