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자매'이야기
가정, 불행의 되물림
영화의 배경이 하필이면, 내 아버지의 고향일까. 동해바닷가 마을이라는 공간이 유년시절의 기억을 기어이 되살려 놓는다. 그들(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친척과 이웃들)은 살기 어린 생활언어와 눈빛, 인간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공격성을 장착했다. 그속에 깊이 쟁여놓은 불안과 생존 본능이 활어처럼 펄떡거렸다. 일상이 되어버린 폭력과 전설이 된 타인의 죽음(때로는 살인까지)이야기가 술상의 안주였다. 마을의 공기는 언제나 비릿했다.
영화에서 폐허가 된 '해돋이 식당'의 추억을 찾는 세자매의 회귀에 대해 생각한다. 여자 세 명이 주인공이지만, 엄마의 존재는 지워지고 없다. 엄마를 배워본 적 없는 여자들과 좋은 아빠를 본 적 없는 아들이 있다. 가정은 사방이 꽉 막힌 벽으로 둘러쳐진 성이다. 그 안에 주민들은 성주가 이끄는 세계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산다. 이 성 안에서 가장 큰 불행은 성주와 주민은 바깥세상의 존재를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폭력은 분명히 되물림 된다는 사실을 관찰의 통계치로 확신할 수 있다. 그 말은 내게도 폭력의 유전자가 있다는 걸 의미했다. 내 안에서 악마가 튀어나올까봐 늘 노심초사했다. 침묵하며 소심한 척했다. 예민한 나의 눈은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선명하게 각인하는 방법만이 내안의 폭력을 잠재울 수 있다고 믿었다. 어른들은 이런 나의 존재를 몰랐다. 아직도 모르고 영원히 모를 것이다.
가부장, 폭력의 이름
나는 생의 전반을 가부장을 증오하다가 괴물이 되어갔다. 내게 가부장은 폭력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나는 스스로 악이 되지 않기 위해 가부장이 되지 않기로 결심했지만, 그러지 못했다(어쩌면 가정을 꾸렸기에 이 문제와 싸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부장의 폭력은 DNA에 각인된 모든 수컷 생명체의 생존 본능일지도 몰랐다. 어쩔수 없는 필연같은 것.
권위와 기득의 환각이 가부장을 키워낸다. 모든 가부장의 죄는 무지에서 비롯된다. 나는 무지하지 않기 위해 묻고 답하고 읽고 썼다. 이제 내가 무지하다는 사실을 겨우 안 정도까지 왔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영원히 도달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세자매들은 모두 무지의 폭력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이것은 성별의 문제가 아니다. 차별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인간성의 문제이고 앎의 문제이다. 자신이 누구이며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하는 일이다. 신에게 기대거나 변명할 게 아니라, 자신에게 묻고 또 물어야 한다.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에게 질문하는 인간이어야 한다. 인간은 질문하기 위해 태어났다.
혁명, 아니면 순교
가정은 화해와 위안의 공간이라는 평범한 결론에 반대한다. 폭력이 되물림 되는 현상을 예민하게 관찰하는 눈을 가진 자는 안다. 폭력의 되물림을 멈추는 방법은 딱 두 가지 뿐이다. 하나는 혁명, 또 하나는 순교(나는 무신론자이며 종교적 의미가 아님)다.
나는 누대로 이어진 폭력의 사슬을 끊어야한다는 천명을 받았다고 믿었다. 저주받은 피를 되물림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내 숙명의 과제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나는 성주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항상 깨어있어야 했다. 성주를 무릎 꿇리고 사과를 받아낼 날을 기다렸다. 성주의 폭력은 애초부터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기에 그의 표정은 언제나 순진무구했다. 가끔씩 폭력은 순진무구한 얼굴을 가졌을지 모른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나만의 방식으로 바깥 세상을 읽었다. 나의 투쟁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었지만, 나 하나 살려내는 데 급급하지 않았다. 그들의 폭력 유전자를 내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했다. 모르는 이들은 이게 그렇게까지 비장해야 할 일인가 싶지만, 내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예수와 석가모니는 폭력과 고통을 끌어안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폭력은 폭력을 낳고, 복수는 더 큰 복수로 이어진다. 끊임없이 돌고도는 불행의 무한 반복을 멈추는 방법은 혁명과 같은 복수가 아니다. 그것을 순결하게 통찰한 자가 있어서 침묵으로 모조리 싸안고 스스로 조용히 죽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이 사실은 폭력의 희생자만 안다.
덧붙임:
나의 아버지가 폭력만을 휘두른 괴물로 보일지 모르지만, 분명히 장점이 많은 사람이다. 인간은 장점과 단점의 양면을 가지고 있다. 세상에는 자잘한 단점을 훌륭한 장점으로 커버하는 사람과 많은 장점을 강력한 단점 하나로 덮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아버지는 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