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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Feb 07. 2024

사과의 조건




"아, 죄송합니닷!"


학생들이 학교에서 사과를 잘 한다는 사실을 아는가? 문제 상황이 생겼을 때 사과의 말을 먼저 던지는 것이 습관처럼 굳어진 학생들이 의외로 많다. 사과는 미덕이니 무조건 하라는 도덕 학습의 결과일까?


습관성으로 사과할 때 학생의 말하기 톤을 보면 두 가지가 있다. 아주 빠르게 밝은 표정으로 사과하는 경쾌한 톤이 있고, 또 하나는 주저하며 어두운 표정으로 사과하는 무거운 톤이 있다. 전자는 빠른 회피가 학습된 경우고, 후자는 자책감이 학습된 경우다.




경쾌한 톤의 사과

자신의 잘못으로 생긴 문제 상황을 빠르게 끝내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엄격한 부모의 양육을 받고 자란 아이가 일반적으로 학습하는 태도이다. 부모가 잘못의 내용보다 사과의 태도를 중시하면 발생하는 부작용이다. 빠르게 사과하고 나면 부모가 더 이상 따지지 않고 넘어갈 때 생긴다. 심할 경우, 상대가 따지는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잘못했다는 말이 먼저 나온다. 이런 사과의 말에 깊은 자기반성이 빠져있음은 당연하다. 사과 받아야 할 입장에서 더 화가 나게 만든다.


영혼 없는 빠른 사과로 문제 상황을 조기에 매듭지으려는 성급함은 집단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문제의 원인을 자신의 잘못으로 간단하게 돌리고 상황을 조기 매듭지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사과를 했음에도 진정성이 없다는 이유로 사과를 받으려하지 않는 사람을 비난한다. 사과는 '하는 사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받는 사람'에게 우선권이 있다. 받는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흡족하게 채워줄 수 있느냐가 사과의 성립 조건이다.




무거운 톤의 사과

문제 상황의 원인이 자신의 책임이라는 마음이 습관적으로 굳어진 학생이다. 이런 경우 작은 성공의 경험보다 자잘한 실수와 실패의 경험(학생 수준의 실패란 공부와 성적일 경우가 크다)이 많다. 성적이 안 좋은 원인을 단순히 자신의 노력 부족에서 찾을 때 습관화된 패배의식의 결과이다. 패배의식이 쌓이면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에도 사과의 말이 습관처럼 나온다. 자책감이 상대로 하여금 연민의 마음을 불러일으켜 문제로부터 쉽게 도망칠 수 있다. 자책감도 회피기제의 한 방식이다.  


자책성 사과를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고 하다보면 나중에 흠뻑 젖었음을 깨닫게 된다. 상처받은 자아는 성인이 되어서 언젠가는 마주하게 되어 있다. 스스로가 만들어낸 깊은 마음의 상처와 대면하기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이것이 집단(가족 또는 국가)으로 확대되면 집단의 관습적 트라우마가 된다. 이를테면 '恨의 정서'가 대표적이다. 이별과 불행한 운명에 놓인 상황마저도 자신의 체념과 인고로 위로 받으려고 한다. 이것들은 문학, 예술, 문화 현상으로 나타난다.




사과의 조건

사과는 분명히 미덕이다. 사과는 직접성, 즉시성, 구체성의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첫째, 사과는 당사자가 직접해야 한다.  대리자 사과와 대리자 용서를 간간히 보게 된다. 아이의 잘못을 부모가 사과(당연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학교현장에서 학생은 물러나 있고 부모만 해결자로 나서는 경우를 종종 목격한다)하고, 전직 대통령 할아버지의 잘못을 손자가 대신 사과하고, 유괴 살인범은 신에게 대신 용서(영화 '밀양'의 범죄자 '도섭')받는다.


둘째, 사과는 빠를수록 좋다(상대가 따지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과해서는 안된다는 점은 앞에서 말했다). 상황과 사과의 시간은 잘못의 판단, 근거, 사과의 방법을 고민하는 시간이면 충분하다.


세째, 사과할 때 잘못의 구체적인 내용을 밝혀야 한다. 직접성과 즉시성은 쉽게 충족하지만, 보통은 구체성이 빠져있어서 사과가 실패로 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기 잘못의 구체성은 충분히 반성할 시간을 가졌다는 성의의 표현이고 앞으로의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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