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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Feb 20. 2024

백일을 견뎌낸 웅녀에게




퇴근 후 책상 앞으로 다시 출근하다

당장 고용관계에 엮이지 않은 상태로 책임의 압박속으로 밀어넣기가 쉽지 않다. 매일 백일 동안 써서 글을 올렸다. 글쓰기 단체가 주는 인센티브도, 한 배를 탄 동료의식도 강력한 글쓰기 동기가 되지 못했다. 글쓰기는 오롯이 혼자 감당해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강제력 없는 글쓰기 동기로 출판용 책을 쓴다는 건 역부족이었다.


딱 하나 얻은 건 있었다. 저작 결과물을 만들어내려면 매일 같은 시간에 책상 앞으로 자신을 출근시켜야 한다는 것. 본업이 있는 나같은 사람은 출근 전 새벽이나 퇴근 후 저녁 시간 책상 앞으로 투잡 출근을 해야 한다는 걸 처절하게 경험했다.




직업인은 싫어도 출근을 해야 한다. 직업인은 과정이 성실하고 아름답다고 보상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직업인은 일의 결과로 월급과 연봉을 받는다. 월급과 연봉은 지난 과정에 대한 보상이면서 다음 일에 대한 동기부여이기도 하다.


작가에게 책은 하나의 완결된 결과물이다. 책이라는 결과물이 반드시 돈으로 보상이 되어 돌아오지도 않는다(그럴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다). 책을 쓰려면 스스로를 책 쓰는 일을 의무지워야 한다. 출판계에서 선인세를 고안해 낸 데에는 이런 이유가 크게 작용했을 거라고 본다.


책과강연의 '백일백장'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얻은 것은 스스로 책상 앞으로 출근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이었다. 그 의무감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절박함이 힘이 되어 나를 이끈 것 같다. 나는 무엇이 절박했을까?




교사가 내 본캐였지

"선생님, 본캐는 교사고 부캐가 작가죠. 작가를 본캐로 하려면 교사를 그만 둬야죠."

할 말이 없다. 정곡이 찔렸다. 지금 나는 교사라는 직업이 본캐다. 책쓰기가 요즘 잘 안된다는 내 변명에 절친한 동료 교사가 내 입에 지퍼를 채워 버렸다. 촥! 그녀가 내게 한 말은 그러니 지금 너무 욕심내지 말라는 말로 해석했다.


욕심을 너무 부렸다. 어쩌면 지금 자신이 원하는 좋은 책을 쓰는 일이 힘든 것은 당연한 일이니 조금 미루던가 천천히 한 걸음씩 나아가면 된다고. 그녀의 말은 위로면서 채찍이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걸 자각시켜 준다.  




이제 곧 새 학년이 시작되는 3월이다. 올해는 또 아이들과 무엇을 해볼까 궁리 중이다. 지역 도서관 북스타트 '독서 토론 한마당' 기획단에 참여하게 됐다. 아내와 연결된 지인의 소개로 우연히 참여하게 되었다. 모든 일은 내게 우연의 옷을 입고 다가와 필연의 몸뚱어리로 안겼다. 이곳에서 나는 또 책 읽는 아이들을 만날 것이다. 벌써부터 설렌다.  


나는 언제나 아이들과 함께 할 때 가장 나다웠다. 아직은 그게 유효하다. 명예 퇴직을 생각하면서 출근하지만, 복도와 교실에서 마주치는 환하게 웃는 아이들 얼굴을 보는 행복으로 하루를 채운다. 내가 학교를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지금 이 순간이 사무치게 그리울 것 같아서다. 사무치는 그리움을 조금이라도 더 적립하기 위해 오늘도 나는 출근한다.




작가, 부캐가 본캐로 전환하는 시간을 기다리며 견디다

본업이 있는 사람이 부업을 본업 만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이었다. 최근 장강명 작가의 책들을 읽고 있다. 그는 기자라는 본업을 접고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불안의 시간을 견디며 소설을 써서 소설가가 되었다. 기자라는 본캐를 접은 데는 더 강렬하게 끌리는 소설가라는 본캐의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소설에는 기자의 피가 섞여 흐른다. 도저히 숨겨지지 않는 삶의 흔적들이 있다. 그의 글은 그것이 강점이다. 그의 글을 읽을수록 질투같은 감정을 느낀다(물론 그는 전혀 알 길 없는 혼자서 치는 북이다). 그의 문학적 성취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안다.




다만, 나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조급함은 없다. 작가의 삶에 대한 욕구가 교사로서 삶의 만족을 능가하지 못하고 있다. 떠나면 사무치게 될 그리움이 크다. 그것은 내가 지금 여기서 해야할 일이 아직 더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장강명 작가가 그렇듯이 내 글 속에서도 교사의 피가 섞여 흐를 것이다.


나는 작가의 본캐 속에 교사의 흔적을 완전하게 지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록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아픔이 있었다. 내 고통의 흔적들이 모두 교사라는 현재의 본캐 속에 들어 있는데 이것을 숨기고는 나는 글을 쓸 수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글쓰기의 성과는 이것을 아는 것까지 왔다는 것이다. 어설프고, 더디고, 힘겹고, 답답하다. 그래도 어쩌겠나. 이대로 어디로든 가보는 수밖에.  


나는 언젠가 작가가 본캐인 삶을 살 것이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오늘도 읽고 쓰고 가르치며 시간을 견디고 있다.  곰이 동굴에서 백일 동안 글을 쓰면 작가가 될까, 오늘도 백일을 견뎌낸 웅녀에게 잉태될 위대한 천손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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