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 아웃

... KTX, 시속 160Km

by 무위




빠르게 달리고 있는 KTX 열차의 창밖은 아직 칠흑 같은 어둠이다. 순간 감각의 혼돈이 시작된다. 흔들림이 거의 없는 안락한 탈 것은 감각을 혼란에 빠뜨린다. 내 몸이 어느 정도의 속도와 높이에 있으며 장차 어디로 이동해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무중력 공간에서 내 오장육부가 모두 분해되어 제각각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 감각이 죽은 육체는 지옥이다.
해가 뜬다. 비로소 시각이 깨어난다. 운동의 속도가 감지되고 이정표로 방향이 감각된다. 비로소 흩어진 기관들이 제자리를 찾는다.
감각이 죽는 꿈을 가끔 꾼다. 그럴 때마다 죽음의 공포가 덮친다.
- 2017.7.24.월 ‘무위록’ 중에서


KTX 타고 서울아산병원 암 검사 가는 길.
새벽 6시 40분 창원중앙역을 출발한다. 오전 9시에 병원에 도착해서 검진 마친 시간 오후 1시. 채혈 30초, X레이 3초, 위내시경 3분, 복부CT 3분, 검진에 걸리 시간은 모두 합쳐도 10분이 넘지 않는다. 나머지 시간은 모두 이동하고 기다리는 시간으로 채워진다. 신속하고 빠르게 진행된 검사시간은 몸에 뭔가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대기와 준비 시간 4시간. 이동시간 KTX 2시간 40분, 지하철 1시간, 합쳐서 왕복 8시간. 병원 검사를 위해 사용된 시간 12시간. 밥먹는 시간 1시간, 중간 여유시간 3시간. 총 소요시간 16시간.

전용구간에서 최대 속력은 시속 300km를 웃돈다지만, 기존 철도에서는 시속 160km로 달린다는 KTX. 자가 운전 시속 100km로 달리면 4시간 30분이 걸리는 시간 거리를 거의 절반으로 줄인다. 인간의 육체가 시속 160킬로미터로 운동하는데 육체는 그 운동에너지를 거의 느끼지 못한다. 차세대 운송 수단으로 서울과 부산을 20분에 주파 하는 순간 이동 시대가 열린다고 한다. 시속 1220Km '하이퍼루프' 속의 인간의 몸은 어떨까 궁금하다.

하루만에 서울에서 검진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는 시대는 놀랍다. 촘촘히 연결된 서울의 대중교통을 타고, 의사만 천육백 명이 넘는다는, 공장의 컨베이어처럼 환자를 치료하는 거대병원 시스템으로 한 명의 환자로 들어간다. 그것은 마치 심장에서 출발한 피가 동맥을 거쳐 모세혈관을 돌아 허파에서 깨끗한 피로 재생되는 혈액순환의 메커니즘을 닮았다. 몸을 정상으로 치료하는 현실 물리계의 하루를 통해 내 몸속 피의 순환을 읽는다. 거시 우주와 미시 원자 세계의 원리가 똑같다는 물리학의 이론이 철학의 영역으로 이해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 2020.1.10.금 ‘무위록’ 중에서




“당신은 걸음이 너무 빨라. 좀 천천히 걸어.”


아내와 함께 걸으면 자주 듣던 말이었다. 수술 후 내 걸음의 속도는 급격히 떨어졌다. 지금은 아내에게 천천히 걸어 달라고 부탁하는 경우가 많다. 몸이 속도를 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그런데 마음은 아프기 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몸의 속도와 마음의 속도가 불협한다. 어쩔 수없이 느린 몸은 조바심 치는 마음에 제동을 걸어온다. 천천히 가라고, 꼭꼭 씹어 삼키라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라고… 그래도 여전히 조바심 치고 빠르게 움직인다. 아내에게 매일 혼난다. 위암이 제동을 걸지 않았다면 몸과 마음은 갈기갈기 찢겨 분해되었을지도 모른다. 수술 전 내 생활의 속도는 시속 160Km, KTX였다.




현재 내 직업은 고등학교 교사 6년 차다. 초임부터 중학교에서만 17년 근무했다. 단 한 해도 빼놓지 않고 학급 담임을 했다. 교사라면 아이들과 함께 웃고 울고 뒹굴어야 한다는 나만의 기준이 있었다. 그것이 교사로서 생활의 에너지원이면서도 나를 고갈시키는 독이기도 했다.


국어 교사면서도 예체능 과목 선생님들과 친하게 지냈다. 음악을 좋아하고, 예술을 사랑하고, 운동을 좋아한다. 축구를 좋아해서 체육선생님들과 친하게 지냈다. 약골의 체력을 가지고 태어난 샌님이었지만 다행히 아버지의 운동신경을 물려받았다. 초등학생 때는 축구선수가 되고 싶어 학교 축구부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교무실 창너머로 체육시간 축구하고 있는 아이들 보는 것이 좋았다. 점심시간, 방과 후, 체육 대회 때 아이들과 어울려 축구를 했다. 남학생들에게 축구하는 국어 선생님으로 통했다. 운동장에서 같이 땀 흘리고 뛰고 뒹굴고 교실에 들어오면 나머지 자잘한 아이들의 생활 문제는 자동해결이었다. 남자들의 세계란 이런 거지.


나는 방송반 선생님이기도 했다. 14년 동안 학교 방송반을 맡았다. 학창 시절부터 개봉관 영화를 혼자 보러 다닐 정도로 영화를 좋아했다. 방송반 아이들과 영화를 만들어 영화제 다니던 게 학교 업무의 꼬리표가 되었다. 지방의 작은 영화제부터 제법 굵직한 전국단위 영화제를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다. 입상한 상금으로 아이들과 치킨과 피자를 사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소수 정예 멤버 방송반 아이들은 언제나 내게 특별하다. 아이들은 성인이 된 지금도 나와 인연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담임교사는 내가 자처한 일이고 방송반은 내가 좋아서하는 꼬리표일 뿐이었다. 중학교는 담임 교사와 업무 교사가 분리되어 있지 않아서 교무실에서 교사들이 해야하는 고유 업무도 함께 맡았다.

분수 넘게 호기심은 많아서 교무실 모든 부서의 업무를 기웃거렸다. 교무부는 학교교육과정 전반을 알 수 있어서, 평가부는 규정업무라서 꼼꼼한 내 성격과 잘 맞아서, 연구부는 국어교사인 내가 맡아야지. 정보부는 그래도 내가 기계와 컴퓨터 다루는 방송반 교사이니 제격이지. 그것도 모자라 신설학교를 자기 발로 두 군데나 찾아다녔다. 신설학교는 일이 많았지만 그만큼 보람도 컸다. 그 보람에 취할수록 내 몸은 조금씩 망가져 가고 있었다.


젊은 남자 교사는 학교에서 꽃이었다. 아름다운 꽃이 아니라 마당쇠 꽃이었다. 3학년 담임을 주로 맡았다. 학생들의 원서를 들고 진학할 고등학교에 뛰어다녔다. 힘든 아이들이 있는 학급을 주로 맡았다. 학교에 결석하는 부모가 없는 학생 집을 찾아가서 데리고 왔고, 폭력 쓰는 아이들을 붙잡고 방과 후에 남아서 몇 시간이고 어르고 달랬다. 지금 생각해보면 몸의 고갈보다 감정 고갈이 더 치명적이었다. 수업은 교사의 본질이지 하며 열정은 어찌나 넘쳤던지…


다른 교사들도 그 정도는 한다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밀어붙이고 또 밀어붙였다. 내가 교사로서 훌륭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투박하고 서툴렀지만 젊었고 겁이 없었다. 뭘 모르면서 그냥 열정으로 뛰어다녔다.




번 아웃.

위암 수술하고 병실에 누워 뼈아픈 깨달음이 찾아왔다. 나는 선천적인 약골이었지. 빠르게 달린다고 잠시 잊고 있었다. 몸이 하는 말을 한 번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뒤늦은 후회가 찾아왔지만 일은 이미 벌어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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