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의 덫

... 시내버스, 시속 80Km

by 무위




오늘도 111번 시내버스를 타고 출근한다. 스마트폰 앱으로 버스가 몇 정거장 몇 분 후 도착할지 확인하고 집을 나선다. 참 편리해진 세상이다. 버스 정류장의 낭만은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데 있다면 편리함이 낭만을 빼앗아 갔다는 혐의는 피할 수 없다.
좋아진 버스 성능은 승객의 안락함마저 빼앗아 갔다. 요즘 시내버스는 사람이 짐짝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힘 좋은 엔진과 짧아진 제동거리는 다급한 마음의 운전기사와 한 몸이 되어 버스 안 승객들을 마구 흔들어 놓는다. 이런 시내버스를 노인들이나 장애인들이 탈 수나 있을까?
시내버스가 급하게 좌회전을 하려다가 똑같이 급하게 비보호 좌회전을 시도하는 승용차와 부딪힐 뻔했다. 기사는 버스 창문을 열고 승용차 운전자에게 아침부터 찰진 욕을 퍼붓고 다시 급하게 액셀을 밟는다. 승용차 운전자는 그 욕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111번 버스는 오늘도 세 번의 우회전과 두 번의 좌회전을 급하게 틀며 다섯 정거장을 쏜살같이 달려 나를 법원 앞 버스정류장에 내던져놓고 간다. 생업을 향해 달리는 아침 출근길, 아스팔트 도로가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속도가 생활을 갈기갈기 분해해 놓는다.
- 2016.10.19.수 ‘무위록’ 중에서


누구나 처음은 있는 법이다. 처음하는 일은 두렵고 어색하다. 111번 버스를 탄다. 요금카드를 찍는데 버스기사가 나를 급히 불러 세우고 멋쩍은 부탁을 한다. 오늘이 처음이라 길안내를 해달란다.
버스노선은 버스기사의 길이다. 잘 아는 길 위에 선 자는 거만하다. 오늘 초보 기사님은 혹여 정류장을 지나칠세라 손님을 놓칠세라 천천히 겸손하게 운전한다. 낯섦이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 겸손한 기사가 가는 길은 신호도 때맞춰 풀리고, 주행을 방해하는 조무래기 승용차도 없다.
나는 기사 바로 뒷자리에 앉아서 의기양양하게 “우회전 좌회전”을 외치는 내비게이션이 된다. 내가 내릴 곳에서 하차벨을 누르지 않고 “저 이제 내려요.” 말한다. 기사는 고맙다고 내리는 순간까지 거듭 인사를 한다. 기분 좋은 신기한 느낌의 출근길이다.
- 2018.10.25.목 ‘무위록’ 중에서


수술 전 생활의 속도가 시속 180Km KTX였다면 지금은 시속 80Km 시내버스 정도는 된다. 위암 수술과 항암 치료, 2년의 휴직을 끝으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옮겼다. 느리게 생활하기는 새로운 과제가 되었다. 뇌전증 진단을 받은 후로 운전대를 완전히 놓았다. 시내버스를 타거나 날씨와 기분에 따라서 공용자전거를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한다. 출근길 가끔씩 건널목에서 나와 똑같은 뚜벅이 선생님과 우연히 만나 함께 걷기도 하고 퇴근길 버스정류장에서 학생과 개인적인 얘기를 나누기도 한다. 더 느려져도 된다.


생활의 속도는 ‘완벽주의 덫’과 연관이 깊다. 에버노트 ‘무위록’에서 ‘완벽주의’를 검색해 본다. 완벽주의마저 어떻게든 해결해야 할 과제로 생각하고 있는 것 자체가 완벽주의인가? 글들이 하나의 길로 완벽하게(?) 정리가 되지 않는다. 이번 챕터는 기록물들을 있는 그대로 나열해 보기로 한다. 뭔가 되겠지 하고.




잘 하고 있는 것은 잘 하고 있으니 당연히 그것으로 된 것이다. 대신 부족한 점을 찾아내려고 한다. 취약점을 끊임없이 보완할 것을 타인에게 요구한다. 완벽주의의 실체다. 자기를 향해서도 사고의 메커니즘은 똑같이 작동한다.
아내가 잘하는 것도 애써 찾아야 잘 보인다고 했다. 잘 하는 것을 더 깊이 있게 잘하게 하고 그렇게 만든 자신감을 다른 영역으로 넓혀 가면 된다. 취약점들을 스스로 발견하여 조금씩 천천히 고쳐나가면 된다. 우리는 이런 걸 교육적 가치라고 부른다. 나는 교육자로서 기본도 실천하지 못했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태도와 완벽하려는 태도는 다르다. 완벽주의는 부족한 부분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완벽주의자들의 주된 심리적 방어기제는 회피다. 내가 견지해오던 삶의 방식이었다. 욕먹을 짓도 일부러 할 수 있는 배짱이 내겐 없었다.
- 2020.5.29.금 ‘무위록’ 중에서


한 여자가 있다. 생활에 지쳤을까? 원래 건조한 성격일까? 그녀를 보면 내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타인의 눈에 비친 내 모습도 어쩌면 저렇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
논리와 이성으로 무장하고 톡톡 쏘는 듯한 어투를 가졌다. 필요한 언어만 간결하게 구사한다. 표정없는 얼굴을 하고 좀처럼 웃음을 보이지도 않는다. 그녀의 얼굴은 늘 창백하고 지쳐 보인다. 잘못 건드리면 터질 듯 위태로운 에너지로 충만되어 있다. 명석하고 일처리는 신속 정확하다. 한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듯 완벽주의 기질이 확연하다.
그녀에게서 젊은 시절 나를 본다. 그녀에 대한 연민이라기보다 나에 대한 연민에 더 가깝다. 나는 아직도 과거와 화해를 못하고 있거나 완전하게 결별을 하지 못했다. 내가 그녀를 잘못 보고 있는 것이길 바란다.
- 2021.6.11.금 ‘무위록’ 중에서


결국 완전한 결론은 없다. 완전하다고 믿는 일의 마무리와 결론 뒤에는 또 다른 문제와 일이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고 있지 않다면 끝내 스스로 다음 문제와 일을 만들어내거나 찾아 내고야마는 삶의 아이러니를 사르트르는 '기투企投'라고 했다지. 나를 던져 넣지 않고는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인간 실존. 나의 완벽주의와 조급증이 별로 의미 없다는 게 신랄하게 증명된다. 그렇다면 순서와 속도의 문제만 남는다. 기다림과 견딤이 절실하다.
'무위의 시간'을 견디는 게 왜 이렇게 힘든 걸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의 나'를 용서하지 못한다. 쓸모와 가치, 효용과 효율, 합리와 완벽의 노예에서 한 발짝도 떼지 못했다. 자기 허용치를 좀 넓혀 보자. 늦어도, 엉성해도, 불완전해도 어쩌란 말이냐. 제발… 쫌… 내버려 둬! 이만하면 충분히 잘 하고 있어!
- 2020.7.7.화 ‘무위록’ 중에서


'완벽' 보다 '대충'이 승자다.
완전히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때로는 정리되지 않고 혼란 상태를 유지하는 게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기도 한다. 완벽하려면 둘러보고 생각하고 몸을 부지런히 놀려야 한다. 완벽주의는 개인을 고갈시킨다.
완전하게 정리된 상태는 생각과 움직임이 스치듯 관여하는 순간 쉽게 깨진다. 그 깨어진 순간을 참지 못하고 원위치시켜 놓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완벽주의자다. 완벽주의자는 본인보다 주변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한다. 완벽주의자 이미 관성에 젖어 있어 몸은 피곤할지라도 정신적 보상의 달콤함을 얻고 싶어한다.
적당한 혼란에 익숙한 사람들은 완전히 정리된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몸의 피곤함도 싫거니와 흐트러진 상태를 더 편안하게 느낀다. 결론적으로 몸도 고갈시키지 않고 마음도 편안한 대충주의자가 승자다.
- 2020.3.23.월 ‘무위록’ 중에서


이상주의자, 세상 모든 사람들이 바르게 살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소수이긴 하지만 극악의 범위를 가뿐히 넘어서는 사람들은 어느 시공간에도 존재한다. 그들을 인정할 순 없어도 피할 수 없는 현상 쯤으로 인식하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 거기에 완벽주의까지 가세하면 자기를 파괴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것은 어리석다. 문득 내가 가엾게 느껴진다.
- 2020.4.9.목 ‘무위록’ 중에서


남들의 평가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는 건 환상에 불과하다. 전혀 평가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겠는가? 잘 살기 위해서는 때에 따라서 비판도 필요하다. 평가받지 않는 삶은 네트 없이 치는 테니스와 다를 바 없다. 타인은… 우리의 자아상과 자존감 형성의 핵심이다. 물론, 타인의 평가가 고통스러울 때도 있지만 존재의 의미와 이유를 찾는데 꼭 필요하다. 부모님, 친구, 동료 혹은 그 누구든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이들의 눈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서는 강력한 자아 의식이 구축될 수 없다…
하지만 만약 원하는 대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면 그런 식의 평가는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나쁜 평가를 받을 위험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좋은 평가를 받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다.
- 지야드 마라 <평가받으며 사는 것의 의미> 중에서

얼마 전 학생 아버지가 억지스럽게 항의 전화를 했다. 그 스트레스 때문일까? 오늘 한 여학생이 내게 문의를 해왔다. 이유를 설명하는데 혼자 진땀을 뺐다. 이해할 수 없는 스스로의 부자연스러움에 학생을 보내놓고도 당황스럽다. 말은 많아지고, 중언부언하고, 확인용 되묻기를 하고, 상대의 표정을 계속 살핀다. 평소 나답지 않다. 나는 아직도 완벽주의를 꿈꾸고 있는가. 비판받을 용기가 더 필요한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 2020.6.18.목 ‘무위록’ 중에서


나는 매일 만나는 사람이라도 마음에 담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다. 시쳇말로 말로 숫기가 없다고들 하는데, 일정 거리를 두고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사람을 관찰하기만 하는 버릇이 있다. 관계에 대해 조심스러운 내 태도를 단점으로 여겼었다. 상대와 관계에 대한 확신이 들면 그때부터 나는 영혼의 교감을 원한다. 관계마저 완벽주의를 원했다. 문제는 아이들을 대할 때도 그렇다는 것.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원래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아무렴 어때. 이런 내 모습마저 사랑하기로 한다.
- 2019.4.18.목 ‘무위록’ 중에서


관계든 일이든 실수와 시행착오를 피할 수 없다. 완벽주의는 허상이다. 힘들고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시행착오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태도로 드러난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에둘러가는 힘든 길이더라도 뚜벅뚜벅 걸어가는 발걸음 과정 자체가 삶일 따름이니… 완벽주의는 합리와 실용이 낳은 사생아다. 합리와 실용의 길에는 따뜻한 온기가 없다. 인간의 온기가 있는 길은 언제나 비합리적이고 쓸모도 부족하다. 인간은 그렇게 불합리하거나 비합리성에 더 가까운 존재이고 쓸모로 가치 판단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완벽주의는 인간의 길이 아니다. 하여 나는 따뜻한 인간의 길을 갈 것이다. 두려움 없이 뚜벅뚜벅.
- 2019.2.24. 일 ‘무위록’ 중에서


나는 일 년을 주기로 많은 아이들과 많은 어른들을 새롭게 만난다. 백지의 상태에서 관계를 만들어가야 하는 직업을 가졌다.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많은 나 같은 초식동물의 경우 3월은 스트레스의 계절이다. 학생 때도 그랬고 교사가 되어서도 그렇다.
경계의 시간은 피로를 동반한다. 나에게 새로운 관계란 설렘과 기대가 아닌 피로였다.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관계마저도 완벽하길 바랐다. 내편과 아닌 것으로 완전하게 선긋기가 끝나야 나의 관계 맺기는 마무리가 된다.
관계는 대지에 굳건히 내린 뿌리가 아니라 잔가지 사이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다. 관계는 찰나이고 우연이다. 관계는 그렇게 쉽게 부서질 수도 있는 여리고도 가벼운 그 무엇이다.
- 2017.3.24. 금 ‘무위록’ 중에서


완벽주의는 악덕이다. 신도 아니면서 감히 신을 흉내내는 오만이다. 완벽주의는 타인을 힘들게 하여 관계를 악화시킨다. 완벽주의는 자신을 옥죄여 결국 파멸의 길로 이르고 마는 막다른 길이다.
나는 겸손으로 위장한 완벽주의자였다. 완벽주의는 겸손을 숙주로 삼고 기생하는 병원균이다. 완벽주의는 자신의 노력의 과정을 철저히 비밀에 부친다. 그 중 '실패'는 일급 비밀에 해당한다. 완벽주의자는 결과를 중시한다. 자신이 노력가가 아닌 능력가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과정은 숨기고 결과만 보여주고 싶어한다.
완벽주의자는 '준비'하는 것이 몸에 밴 사람이다. 나는 준비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 때로는 준비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다 보니 피로가 빨리 몰려온다. 시작도 못 해보고 좌절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완벽주의의 벽 때문에 실천가가 되지 못했다. 소심함과 두려움의 출발점은 바로 완벽을 기하려는 나의 습관에 있었다.
- 2015.7.8.수 ‘무위록’ 중에서




“여보, 자기 자신을 좀 더 위로해 봐.”

“그 동안 힘들었지? 이 정도면 충분히 잘 하고 있어! 라고 스스로에게 칭찬을 해 줘.”


아내의 말이 맞다. 이 정도면 충분히 열정적이라고. 이제 좀 게으르게 살아도 괜찮다고. ‘무위록’ 안에 ‘완벽주의’ 키워드를 읽으며 깨닫게 된다. 나는 내 안에 이미 해답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