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들려주는 아니마 이야기

… 자전거, 시속 20Km

by 무위




‘아, 바아 라암’
자전거를 타고 ‘바람’ 하고 발음한다. 나의 바람은 뭘까 하고 조용히 묻는다. 바람을 느끼고 싶어 자전거를 타고 퇴근한다. 춥거나 덥지만 않으면 퇴근 시간에는 거의 자전거를 탄다. 내가 타는 자전거는 간지나는 로드 바이크가 아니다. 오늘 출근복은 청바지, 흰색 티셔츠에 카디건이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카디건도 꽤나 낭만적이고 멋있다. 자전거 바구니엔 백팩이 실려 있다.
‘누비자’ 이름도 참 잘 지었다. 창원시 공용자전거는 성공한 시민사업 아이템이다. 내 자전거가 아니면서 시내 전역에 있는 모든 자전거가 내 자전거다. 비싼 로드 바이크를 샀다면 자전거를 모시고 다녀야 한다. 소유한다는 건 무거워진다는 것.
- 2021.3.26.금 ‘무위록’ 중에서


죽을 병을 겪고 나니 무엇인가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욕망이 사라졌다. 집을 사야겠다는 마음도, 진급을 해야겠다는 조바심도,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욕심도 없다. 내 것인 게 없으니 모두 내 것 같다.


“여보, 우리는 이렇게 평생 전세로 살자. 한 군 데 붙박히지 말고 아이들 성인되어 독립하면 우리는 바람처럼 살아 보는 거 어때? 제주도에 이삼 년 살다가 강원도에도 살아 보는 거야. 영국에서 공부하고 싶어하는 딸 따라서 런던에도 일 년 살아보는 거지. 또 각자 살고 싶은 데서 일 년 떨어져 살아보는 거야. 또 같이 살고 싶어지면 합쳐서 살고… 어때 괜찮지 않아?”

“바람 타령하다가 당신 바람 난다.”


아내는 시크하게 농담했지만 우리는 암묵적으로 이미 동의했다.




비싼 자전거 한 번 사본 적 없었지만 나의 자전거 사랑은 유서가 깊다. 어렸을 적 내가 사는 동네에서 가장 빨리, 형들이 타는 두 발 자전거를 가졌다. 우리집이 유복해서는 아니었다. 직업 군인을 전역하고 일용직 공사장 인부로 일했던 아버지는 머리보다 몸을 쓰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여자 아이처럼 수줍음 많고 조용한 나를 강하게 키우고 싶어했다. 아버지는 자전거 안장에 앉아서 땅에 발도 닿지 않는 다섯 살 때 자전거를 사주셨다. 내가 사달라고 조르지 않았는데도…


어느 날, 발도 잘 닿지 않는 그 자전거에 앉아 있다가 떨어진 적이 있었다. 머리부터 떨어졌다. 뇌진탕. 눈을 뜨니 방안이었다. 머리와 얼굴에는 물이 잔뜩 묻어 있었고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로 40분 이상을 누워 있었다고 했다. 엄마는 빨리 병원에 데리고 가야한다고 했고, 아버지는 조금 더 기다려 보자고 했다. 이제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병원 데리고 가려는 순간 내가 깨어났다고 했다. 119도 엠뷸런스도 없던 시절이었고 병원까지 나가려해도 한 시간 이상이 걸리는 도시 주변 반촌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많이 다쳤고 아팠고 죽을 고비도 넘겼다. 부모님은 아이의 생명을 지켜주는 신이 있다고 믿었던 거 같았다. 뇌진탕 사건으로 엄마는 자전거를 너무 어린 나이에 사줬다고 아빠를 나무랐다. 엄마는 내게 자전거 탑승 금지령을 내렸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쌩쌩 신나게 달렸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감촉이 좋았다.


나는 태생적으로 약골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밤에 자다가 오줌을 쌌다. 고상한 병명 야뇨증. 한 살 많은 누나도 다섯 살 아래 남동생도 그러지 않았다. 마당에는 매일 오줌에 전 이불 빨래가 바지랑대에 축 늘어진 빨랫줄에 널려 있었다. 엄마는 어르다가 달래다가 어떤 날은 짜증도 냈다. 용하다는 한의원의 약은 안 먹어 본 게 없었다. 엄마는 숯불을 피워 손부채로 부쳐가며 내게 한약을 수도 없이 달여 먹였다. 나는 쓴 한약이 먹기 싫었다. 매일 밤 잠을 설치게 하는 엄마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엄지와 검지로 코를 꾹 누르고 한약을 군말 없이 먹었다.


오줌을 쌀 때마다 나는 엄마를 깨웠다. 엄마는 따뜻한 물수건으로 내 가랑이와 엉덩이를 꼼꼼하게 닦아주었다. 나는 엄마가 주는 깨끗해짐과 돌봄이 좋았다. 시원하게 비워진 방광과 뽀송뽀송한 옷을 입고 다시 잠이 들었다. 나의 숙면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어쩌면 내 무의식이 사랑받고 싶은 장난질을 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고등학생 때까지 코피를 달고 살았다. 시험기간이면 어김없이 코피가 났다. 선생님과 친구들은 밤샘 공부했냐며 오해를 했다. 나는 그렇게 공부하고서도 성적은 왜 그 모양이냐는 소리 같이 들려서 코피 나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화장실 세면대로 달려갔다. 신기하게도 시도때도 없이 터지던 코피는 군대 가서 멎었다. 가족들은 나보고 군대 갔다와서 사람됐다고 했다.


어렸을 때 나는 겁 많고 소심한 아이였다. 남자 아이들이 의레 치르는 힘으로 서열을 가르는 수컷 특유의 본능도 없었다. 싸움은 내쪽에서 먼저 피했다. 겁쟁이라는 낙인이 싫어 어쩔 수 없이 싸움이 붙었을 때도 연방 코피를 쏟는 쪽은 나였다. 맞고 들어오는 아들을 아버지는 늘 못마땅해 했다. 아버지는 치료비 물려줘도 좋으니 제발 때리고 들어오라고 했다. 그런 말 아무리 해도 내가 싸움에서 이기고 들어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 기억난다. 복싱 글러브.

자전거를 사준 시기와 비슷하게 아버지는 복싱 글러브를 사줬다. 차라리 맞는 법을 가르치는 게 더 나을 거라는 현실적인 판단을 했을까. 맷집이라도 키워 보라고. 맞아보면 맞는 게 그렇게 무서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해주려고. 그러면 때릴 수도 있다고. 아버지는 내 속에 숨어있는 수컷 본능을 깨워주고 싶어 안달했다.


나는 아버지와 복싱을 하며 놀았다. 아버지가 술이 적당히 취한 날이면 복싱 매치가 벌어졌다. 아버지는 앉아서 나를 상대해 주었다. 나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발을 활용하여 잽잽, 스트레이트를 아버지 얼굴에 있는 힘껏 꽂아 넣었다. 주먹 끝에 전해지는 사람 얼굴을 타격하는 느낌은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쾌감 같은 것이 있었다. 결과는 늘 나의 KO승. 아버지의 복싱 패배자 연기는 꽤 괜찮았다. 나는 진짜 아버지를 이겼다고 생각했다.

복싱도 내게 숨어있는 공격성을 깨워내지 못했다. 아버지는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맞는 방법을 먼저 배워야 하고 많이 맞아 본 사람이 강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맞으면 아프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진짜 싸움은 더더욱 무서워졌다.


장정구, 유명우, 박종팔 선수의 세계타이틀매치가 있는 날이면 아버지와 동생, 나 이렇게 수컷 셋은 텔레비전 앞에 앉아 가슴을 조리며 응원을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선수의 자세를 눈으로 익혔다. 복싱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사각의 공간에 혼자 내던져진 스포츠다. 믿을 건 자신이 가진 육체의 능력 뿐이다. 그리고 상대를 반드시 쓰러뜨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쓰러진다. 격투기는 가장 원초적인 매력의 스포츠임을 나는 어린 나이에 알았다.

하지만 아는 것과 현실의 거리는 멀었다. 내 안에 감춰진 건 남성성이 아니라 아니마(anima: 융, 남성 무의식 안에 존재하는 여성성)라는 사실만 분명해졌다. 그 괴리감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내 안에 있는 아니마를 숨기기에 바빴고 없는 남성성을 어떻게든 꺼내려고 노력했다. 그럴수록 나는 '진짜의 나'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위암을 겪고 난 지금 가장 큰 변화와 이득이 있었다. 이제는 내 안에 있는 아니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내게 남성성을 요구하지 않았다. 남성성이 꽃피는 술 자리에 억지로 끼지 않아도 됐다. 못 마시는 술을 억지로 마시라고 권하지 않아 좋았다. 남자가 왜 그렇게 나약하냐고 말하지 않았다.

외롭지 않았고 오히려 자유로워졌다. 20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는 여자들이 많은 공간과 직장에서 생활하고 있다. 내겐 자연스러운 일이고 불편함이 없다. 내 안에 있는 아니마는 나약함이 아니라 섬세함이었고 따뜻함이었다. 나는 남자 친구보다 여자 친구들이 더 많다. 아내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준다.




수술실 들어간 아내를 기다리며…
아내가 입원했다. 여자 병실에는 간병하는 보호자가 거의 없지만 남자 병실에는 간병하는 여자 보호자가 언제나 옆에 있다. 남자들이 더 독립적이라는데 이건 얘기가 좀 다르다.
여자가 암에 걸렸을 때 그 반대보다 이혼율이 훨씬 높다는 통계가 있다는 걸 얼마 전 책에서 읽었다. 여자 병실에는 왜 병간호하는 남편이 없을까? 아내는 출근했을 거라고 했다. 아, 그렇겠구나. 하지만 나이 든 환자도 남편이 모두 일할까 생각하니 꼭 그것만도 아닌 거 같다.
생각해보니 나이도 젊은 남자가 마누라 병간호하고 있는 나를 보고 신기해 할 것 같다. 여자들은 이 남자는 직업이 없나? 무슨 일을 하길래 이 시간에 여기 있나? 라고 궁금해 할 것 같다는 생각이 그제서야 들었다.
환자 여덟 명 가운데 전문 간병인 한 명 빼고 개인 간병인은 나 혼자다. 그리고 이 방 안에 나 혼자 남자다. 하긴 뭐, 어제 여기가 여자 병실이구나를 인식하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여자들 많은 곳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참 희한한 인종이긴 하다. 나는 상관 없는데 다른 환자들 입장에서는 남자인 내가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게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남자 병실과 여자 병실은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남자들은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거는데 시간이 걸리지만 여자들은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처럼 말을 건다. 자기가 이렇게 아프기까지의 과정과 경위를 설명하는 것에서 대화의 물꼬를 튼다. 자신의 주변 지인에서 출발하여 자기 가족 얘기로 들어오는 데도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는다.

남자들은 자신의 고통에만 집중하지만 여자들은 타인의 아픔을 연민하고 자신의 고통을 위로받고 싶어 한다. 남자 병실 텔레비전에는 올림픽과 정치 뉴스에 채널이 고정되어 있다. 그리고 조용하다. 여자 병실 텔레비전은 드라마 채널이 하루 종일 돌아간다. 드라마 이야기만으로도 하루 종일을 떠들 수 있다. 그리고 시끄럽다.
옆자리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는 8인 병실 거의 모든 환자들의 식판을 손수 치워 주신다. 싸 온 음식을 병실 환자 모두에게 나눠준다. 여자 병실은 시골 마을회관 잔칫날 같다.

병실은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다르게 진화해온 동물인지 잘 보여준다. 여긴 생명에 지장 없는 정형외과 병동이지만 생명을 다투는 중증 병동일수록 그 차이는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걸 나는 잘 안다.

수술실 앞을 지킨다. 아내는 오래전 배구하다가 다친 무릎 연골판 수술을 받는다. 위암으로 위를 절제하는 남편과 심장을 열어 막힌 혈관을 뚫는 엄마를 수술실에 들여보내 놓고 아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생각하는 시간으로 40분을 보낸다.
아내는 수술실을 나오자마자 올림픽 여자배구 한국이 있겼지? 한다. 불과 몇 분 전에 끝난 경기 결과를 어떻게 아느냐고 했더니 안에서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으이그 못 말리는 이놈의 배구 사랑. 배구하다가 무릎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선… 누가 보면 배구 선수인 줄 알겠다. 병실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에 안에서도 도우미 어르신과 배구 얘기 삼매경이다.

정형외과는 소위 나이롱 환자들의 천국이라는데 여기 누워 있는 수많은 환자보다 위가 없는 내가 최고의 환자다. 물론 사람들은 모를 테지만. 환자가 환자 보호자 역할을 하려니 힘이 든다. 내 몸이 힘드니 환자 슬리퍼 발 앞에 놓아주는 것도 귀찮다. 밥을 굶어서 배도 고프다.
- 2021.8.4.수 ‘무위록’ 중에서




엄마는 손에 든 때수건을 벗어던지고 다시 나를 때렸다. 나는 무엇이 그토록 엄마를 화나게 하는지, 엄마의 분노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몰랐다. 내가 참아야 하는 것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그저 아프고 서러웠을 뿐이다... 목욕이 끝난 내 몸 곳곳은 울긋불긋했다. 엄마가 때수건으로 민 자국과 때린 손자국이 온몸에 교차된 채 남아 있었다. …
"중국 황실 자손도 아니고 이렇게 여자들한테 둘러싸여서 목욕을 하다니... 속으로 무슨 영문이냐 이러고 있겠어. 만수야, 그치?"
"우쭈쭈, 아가야, 너 여기가 금남의 구역인 걸 알고는 있니?"…
"아 맞다, 여기 여대지? 어쩐지 학교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아늑하고 편안하게 느껴지더라. 나는 옛날부터 여탕이 더 정감 있고 편하더라고. 아흐, 남탕은 너무 삭막해."
- 김유담 <이완의 자세> 중에서

김유담의 소설이 잊고 있었던 유년의 기억을 소환한다. 정확한 기억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엄마를 따라서 초등학교 1,2학년 때까지 여탕에 갔다. 그때는 그랬다. 나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 발육이 좋은 편이 아니어서 엄마는 아직 초등학생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다. 주인 아줌마는 정말 모르는지 알면서도 속아 주는지 거짓말은 통했다. 여탕의 엄마들은 전혀 이질감 없이 나를 받아 들였다. 그래서 나는 여탕이 편했다. 여탕의 아줌마들은 내게 말했다.

"너는 꼭 여자애 같이 생겼네."
"이렇게 벗겨놓지 않으면 꼭 여잔 줄 알겠네."

나는 혹시 전생에 여자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때까지 그 말이 싫지 않았다. 엄마따라 여탕에 들어갈 수 있는 프리패스였으니까. 좀 클 때까지 여탕에 드나들 수 있었던 건 늦은 발육보다 여자처럼 곱상하게 생긴 외모가 더 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여자들은 벌거벗은 채로 수다를 떨었다. 남편 속 썩이는 얘기, 시어머니 욕하기, 티 나지 않게 은근히 자식 자랑하기. 여자들은 자기도 여자면서 왜 시어머니를 저렇게 싫어할까. 저렇게 남편을 미워하면서 결혼은 왜 했을까.
그러면서 주변 엄마들이 내게 보이는 관심을 싫지 않았다. 목욕 후 뽀송뽀송한 내 몸이 좋았고 주변 엄마들이 이쁜 남자애라며 사주는 병에 든 우유를 얻어 마시는 것도 좋았다.

엄마는 다섯 살 어린 남동생과 한 살 많은 누나 이렇게 셋을 여탕에 데리고 가 자식 세 명의 때를 밀었다. 참 알차게도 밀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을까? 엄마는 원더우먼이 틀림없었다.

그때 우리들의 놀이는 주로 흙과 함께했다. 땅따먹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비사치기, 두꺼비집 짓기, 오징어 달구지... 엄마가 때를 벗겨놓기가 무섭게 손에는 거북이 등껍질 같은 때가 다시 눌러 붙었다. 공부하다가 나는 엄지와 검지 사이에 눌러 앉은 때를 손톱으로 긁어냈다. 그러면 벗겨진 자리는 불그스름하게 새살이 보였다. 나는 새살이 좋았다. 가끔씩 연한 살에 상처나 피를 흘려 피딱지가 앉기도 했다. 엄마는 집에서 머리를 감길 때나 목욕탕에서 때를 벗겨 주다가 그걸 보면 화를 냈다. 아버지가 술 먹고 엄마 속을 긁어 놓을 때면 때밀이 수건을 손에 낀 채 내 손등을 때리기도 하고 등짝을 때리기도 했다. 그리고 엄마는 꼭 이런 말까지 덧붙였다.
"속 썩이는 건 아비나 자식이나 어째 이래 똑같노."
나는 술 먹는 아버지와 똑같이 취급당하는 게 억울했다.
아버지는 나를 남탕에 데리고 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공중목욕탕에 가는 걸 싫어했다. 아버지는 공사장에서 땀 흘리고 집에 돌아오면 계절 가리지 않고 집에서 차가운 지하수를 뒤집어 썼다. 아버지의 목욕은 그게 다였다. 엄마가 아들 데리고 목욕탕에 가라면 밀어도 또 나올 때를 밀어서 뭐하게 했다.

고학년이 되어서 더 이상 여탕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을 때 아버지와 남탕에 함께 간 날을 기억한다. 남탕은 어색하고 불편했다. 남자들의 알몸을 이렇게 단체로 보는 건 충격이었다. 나도 남잔데 이 설명할 수 없는 이질감은 뭐지? 모르는 다른 남자들의 벗은 몸보다 아버지의 알몸이 더 어색했다. 나는 엄마의 몸과 여탕이 익숙했다. 엄마와 엄마를 닮은 여자의 벗은 몸이 더 자연스러웠고 내 알몸도 그녀들 사이에서 이질적이지 않았다.

사춘기가 되었을 때 나는 35번 시내버스를 타고 동생을 데리고 목욕탕엘 다녔다. 그땐 내가 아들을 데리고 남탕에 가는 아버지 같았다. 목욕을 하고 나오면 우리는 짜장면을 사 먹었고 바나나 우유를 물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왜 둘이나 있는 아들들을 데리고 목욕탕에 가질 않았을까.

지금 나는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자주 간다. 목욕하고 나오면 역시 바나나 우유지 했고 아들은 그건 어디서 나온 규칙이냐며 초코우유를 먹는다.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 갔다오는 길에 나는 아버지보다 동생을 떠올린다. 목욕탕 나오는 길엔 아들이 동생같다. 동생에게 걸던 장난을 아들에게 치기도 한다.
- 2021.6.8.화 ‘무위록’ 중에서




여성성에 기대어 살아가는 게 남자들 아닌가요? 어려서는 어머니에게, 자라서는 누님에게, 결혼 뒤엔 아내에게, 아내에게 다 못 쏟은 정은 딸에게…
- 이철수 <웃는 마음> 중에서

나는 소위 남성성으로 대표되는 폭력성, 이기주의, 허세 등을 경멸했다. 내 안 깊숙이 DNA 속에 유전한 남성 유전자가 불쑥불쑥 고개를 쳐들 때의 나를 극도로 싫어했다. 약자 앞에서 행해지는 찌질한 작은 폭력, 남자라서 당연하게 취해오던 이기성, 남자들 속에 있을 때 지고 싶지 않은 경쟁심이 허세로 드러날 때를 혐오했다.

만약 내가 여자로 태어났다면 나는 여자를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나의 젠더 정체성은 남성적 폭력성 혐오에서 출발했다. 그 혐오의 이유는 나는 강한 남성이 아니라고 스스로 여기기 때문일 거다. 육체적 생물학적 강함이 발생시키는 폭력 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권력 관계에서 파생되는 폭력까지 모든 것을 포함한다. 나는 모든 유무형의 폭력을 혐오한다.

어쩌면 나는 생물학적 젠더를 남성으로 태어난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남성의 폭력성을 거부하는 이유로 여성성을 옹호하는 지금의 젠더 포지션은 실보다 득이 많아 마음에 든다. 남자들 사이에서 나의 정체를 적당히 퉁칠 수 있을 만큼 외형적 남성성은 충분히 발현되어 있다. 마음이 잘 통하는 여자 이성 친구들을 누구보다 잘 만들 수 있는 남자라서 좋다. 여자로 태어났다면 나는 극단적 페미니스트가 되었을까, 여성 동성애자가 되었을까?
- 2020.2.29.토 ‘무위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