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섭식장애인의 설거지론

... 걷기, 시속 2Km

by 무위





맨발 걷기

점심 급식을 먹고 부장 선생님이 같이 맨발 걷기를 하자고 했다. 운동장에 짙게 드리운 초록빛이 좋아서 그러자고 했다. 식사 직후 무기력감 때문에 바로 움직이는 것을 피한다. 보통의 경우는 휴게실로 직행한다. 그래야 오후 수업을 할 수 있다. 부장과 기획 선생님의 걸음을 따라가지 못해 뒤따라 가다가 나는 멈춰섰다.
"나는 밥 먹고 바로 못 걸어요."
"그래요?"
"난 밥 먹고 누워 있어야 해요."
"누워 있으면 안 좋잖아요. 역류성 식도염 그런 거 걸리잖아요."
"비스듬히 누워요."
"아 그렇구나."
"난 위 전체가 없어서 음식이 장으로 바로 내려가요."
“위 전체가 없었어요?"
"모르셨군요. 아아, 내가 말씀 안 드렸나요?"
나는 밥 먹고 바로 못 걸어요. 나는 밥 먹고 바로 못 걷는데. 바로 못 걷는데. 못 걷는데. 못 걷. 못. 못. 못… 나는 위 전체가 없어요. 전체가. 전체가. 전체…
내가 말 했었나? 안 했었나? 여기저기 말하고 다녀도 이 사람한테 말을 안 했나? 해도 기억 못하나? 나도 헷갈리고 당신들도 헷갈린다. 내 첫 책 <쌤, 뭐하세요?>에서는 임팩트를 싣는다고 첫 문장에 썼었는데. 전체가 잘려나간 내 위장은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라고.
수 백번 수 천번 되뇐 혼자만의 언어였다. 발설된다고 모두 상대가 듣는 건 아니라고. 쓴다고 다 상대에게 가닿는 건 아니라고. 언어는 태생적으로 타인에게 닿을 수 없다고. 그래서 마음은 상대에게 도달하기 어렵다고. 타인은 지옥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입을 닫아야 한다고. 철학자들은 말했다.
그런 타인들에게 섭섭한 감정은 없다. 고통은 결국 내 것일 수밖에 없구나. 진실만 명확해진 오후다. 내 속에서 이 언어를 되새김질하지 않는 날이 비로소 완전하게 자유로워지는 순간일 것이다. 혹시 아내나 자식들도 내가 위 전체가 없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잊었을까? 라는 의심까지 한다.
- 2021.6.21.월 ‘무위록’ 중에서


나는 장애인이다. 섭식 장애인. 팔다리가 불편하다면 타인의 눈에 장애인으로 보일 테지만 나의 장애는 겉으로 티가 나지 않는다. 신체 기관의 일부가 영구적으로 불편하다면 장애인이 맞다. 정상인들은 위를 전 절제했다고하면 위가 다시 자라나 완전히 정상적으로 돌아온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람의 위는 도마뱀 꼬리가 아니랍니다라고 점잖게 말하고 싶지만 해본 적은 없다. 부분 절제와 전 절제를 명확하게 구분했을 때 이 말은 맞는 말이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나는 위 전체가 없다고 하면 학생들은,

“그럼, 밥은 어떻게 먹어요?” 하고 묻고, 나는,

“입으로 먹지.” 하고 대답한다.

어른들은,

“암이 많이 진행되었나 봐요.”

“아니요, 생긴 위치가 좋지 않았어요.”

“위치라구요? 위장에 생기면 다 똑같은 위암 아닌가요?”

“위암의 80퍼센트는 위장의 아랫쪽에 생기고, 나머지 20퍼센트는 윗쪽에 생기는데 윗쪽에 생길 경우는 아랫쪽을 남기는 건 의학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아요. 재발의 위험도 높고 위장의 역할도 제대로 할 수 없어요.”

나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않은 내용이라서 이 이상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상황에 따라서 자세히 설명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이쯤에서 설명을 멈춘다. 장애인은 자신의 불편을 정상인에게 언어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데 소외감을 느낀다. 불편의 고통은 오롯이 자기만의 것이다. 언어는 경험을 뛰어넘을 수 없다. 누구를 원망할 일도 섭섭해 할 일도 아니다. 자기 자신이 평생 안고 가야 할 천형 같은 것이다.





음식 편집증

패럴림픽 아이스하키 동메달 결정전을 멍하니 보고 있다. 두 발로 유영하며 미끄러지듯 스케이팅하면 얼마나 편할까. 손으로 썰매를 밀며 힘겹게 이동하는 선수들의 힘든 표정에 경외감이 생긴다. 생은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 속에서 살뜰하게 살아야 하는 무엇이다.
내가 수업 들어가는 교실에도 근위축증을 앓고 있는 학생이 있다. 펜을 잡기도 힘든 손으로 아이는 열심히 필기를 한다. 특수교실과 일반교실을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며 열심히 수업을 듣는다. 수행평가나 시험도 빠지거나 게을리하지 않는다. 학생은 올해 졸업한다. 며칠 전 세상을 떠난 스티븐 호킹을 닮았다. 학생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보다 살아간다는 건 이렇게 숭고한 거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갑자기 이들의 삶이 내 시선 안으로 조금 자리하게 된 이유가 있다. 얼마 전 첫 수업,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나는 섭식장애인이라는 말을 했었다. 장애와 비장애의 선은 위태롭고 경계가 모호하다. 나는 의식적으로 장애인의 삶과 거리두기를 하고 살았었다.
신체적 약점을 어떻게 보느냐는 삶을 대하는 중차대한 문제다. 모든 사람은 크고 작은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 약점들이 바로 ‘장애’다. 현재 주어진 불리한 삶의 조건을 받아들이고 나름의 방편을 찾는 게 인생이다. 그렇게 본다면 장애는 그리 대단할 것도 없고 절망할 일도 아니다.
-2018.3.17. 토 ‘무위록’ 중에서


섭식 장애인이라고 하면 대개 ‘거식증’을 떠올리지만 내 섭식 장애는 ‘음식 편집증’이다. 먹는 것이 올가미처럼 내 남은 삶을 붙듵고 있다. 무서운 허기의 공포. 그것의 짧은 주기. 그래서 자주 먹어 보지만 장의 포만감은 쾌락이 아니라 불편함을 가중시킬 뿐이다. 많이 먹지 못할 뿐더러 힘겹게 먹어도 포만감은 금방 사라지고 허기가 찾아온다. 허기의 공포와 포만이 주는 불쾌감이 연속된다. 배고파 힘들고 배불러 불편하다. 지금 내 섭식 장애의 요약이다.

위액을 분비하고 음식물을 분해해서 천천히 소장으로 내려주는 기능이 전무한 상태다. 음식을 먹고 소화시키는 매 순간이 불편하다. 남들이 오해하지 않게 몸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태를 설명해야 할 경우가 많다. 도움이 필요하거나 양해를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단위 공간 당 사람의 관계 밀도가 가장 높은 직업을 가졌다. 촘촘한 관계의 밀도 속에서 몸의 불편함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타고난 예민함이 수술 후 계속 가중된다. 먹는 문제는 감정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내 나쁜 감정의 진원지는 먹는 것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식전 공복과 식후 포만의 상태에 있을 때 나쁜 감정들이 솟아난다. 정상인들도 비슷하겠지만 나는 그 주기가 짧고 감정의 격차가 심하다.

심한 공복을 피하기 위해 적절히 자주 먹고 과포만 상태를 피하려고 조금씩 먹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식욕은 갈수록 커지고 조금만 먹어도 과포만 상태에 빠진다. 금방 허기가 몰려와 허겁지겁 음식을 찾는 짧은 주기가 반복된다. 한끼 정도 굶어도 끄떡없고 먹고 나서도 활동이 가능한 정상이던 상태가 그립다. 먹는 것에 대한 과도한 집착 때문에 불안과 우울이 끊이질 않는다.




설거지론


운전대를 놓게 되자 기동성을 요하는 바깥 일은 아내가 맡았다. 자연스럽게 주방을 포함한 집안 일은 내 차지다. 기상하면 어제 설거지한 그릇들을 정리한다. 끼니 중간에 먹을 과일 도시락을 싼다. 아내가 출근하는 차 안에서 마실 커피를 내리고 딸과 아들 먹을거리를 준비한다.

주방은 내 자리가 되었고 설거지에도 나름의 규칙과 철학이 생겼다.


오늘 저녁 설거지는 아내에게 빼앗겼다. 설거지하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다가 김영민의 설거지론을 읽으며 혼자 웃는다.


설거지의 존재론. 설거지는 과정입니다. 인생이 한 순간의 이벤트가 아니듯, 설거지 역시 긴 취식 과정의 일부입니다. 요리의 시작은 쌀을 밥솥에 안치는 일일까요? 아닙니다. 요리의 시작은 장보기입니다. 식사의 끝은 디저트일까요? 아닙니다. 식사의 끝은 설거지입니다. 설거지의 끝은 식기를 헹구는 일일까요? 아닙니다. 싱크대의 물기를 닦고, 가스레인지의 얼룩을 닦고, 도마를 세워놓고, 수세미를 잘 마를 수 있는 위치에 놓을 때 비로소 설거지는 끝납니다.
설거지의 윤리학. 설거지는 밥을 하지 않는 사람이 하는 게 대체로 합리적입니다. 취식은 공동의 프로젝트입니다... 혹자의 삶이 지나치게 고생스럽다면, 누군가 설거지를 안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설거지의 문명론. 설거지는 귀찮은 일입니다... 그러나 설거지를 너무 미루면, 집에 불을 지르고 싶어집니다. 문명은 귀찮음을 극복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문명이냐 야만이냐는,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꺼내 그대로 먹느냐, 아니면 예쁜 접시에 덜어 먹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물론 문명생활의 대가는 엄청난 설거짓거리입니다.
설거지 인간론. 설거지는 취식의 업보입니다... 성장과 노화란 곧 썩어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설거지 없이 깔끔하게 살아 있을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육체와 정신을 잘 씻고 살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의 설거짓거리로 전락하게 될 테니까...
모든 설거지는 이론보다 실천이 중요합니다.
- 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중에서


나의 즐거움인 설거지를 오늘 아내에게 빼앗긴 이유는 아내의 동작이 나보다 빨랐기 때문이다. 밥 숟가락 놓기 무섭게 설거지를 해치우는 나에게 자기가 할테니 그냥 놔둬라는 말이 의미없다는 걸 알았나 보다. 숟가락 놓자마자 내가 그릇들을 치우자 아내는 바로 싱크대 앞을 먼저 점령해 버린다. 오늘은 아내가 요리하고, 설거지까지 했으니 '설거지 윤리학'에는 불합격.
설거지를 끝낸 싱크대를 아내가 눈치 채지 않게 검사에 들어간다. 물을 뺀다고 개수대 음식물 잔반통을 비우지 않았고, 인덕션 렌지의 오물을 닦지 않았다. 인덕션을 바로바로 닦아놓지 않으면 열기로 녹았다 타서 굳으면서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다고 얘기했는데도 늘 그렇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는 그릇들을 건조대에 대충 널어논 것을 내 규칙대로 컴팩트하게 재정리한다. '설거지 존재론'적 측면에서 아내의 오늘 설거지는 불합격.
반찬통 채로 그대로 먹지 않고 반드시 접시에 덜어 먹는 습관은 내가 아내에게 배운 '설거지 문명론'의 실천 강령이라서 언제나 합격.
내 정신과 육체를 잘 닦고, '일신우일신'하고 있는지, '설거지 인간론'은 글쎄다. 재미있는 책을 발견했다.
- 2020.1.30. ‘무위록 중에서
특별한 것은 없지만, 나열하니 참 많은 일을 한 하루다. 매일 하는 일이지만 거를 수는 없는 것들.
반복되는 일이지만 어제의 설거지와 오늘의 설거지는 다르다. 설거지하는 순간에 떠오르는 생각이 다르고 기분이 다르다. 같은 듯 달라서 견딜 수 있고 다른 듯 같아서 생활은 영위된다. 언제부턴가 '견디다'라는 단어가 좋아졌다. 오늘 하루도 잘 견디어 낸 내가 대견하다.
"설거지할 때는 설거지하는 일에만 집중하라” 고 탁닛한 스님은 말했지만 나는 설거지할 때 생각이 가장 많다.
- 2020.1.31.금 ‘무위록’ 중에서
강박에 관하여… 설거지 이야기
일련의 순서와 정해진 위치가 있다는 건 깊은 사고를 필요로 하지 않고 즉시 해결할 수 있다는 간결함이 장점이다. 설거지와 그릇 정리는 내게 일종의 긴장과 불안을 없애주는 일이고 그 루틴에 집착하는 강박으로까지 나아갔다. 아내도 이미 눈치채고 있는 것 같다. 남편이 설거지 해주니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주부생활의 안락함에 주변에선 아내를 부러워 하지만, 거기에 간절함과 아픔이 배어 있다는 내막을 아는 사람은 없다. 나는 그걸 청결 혹은 결벽이라고 말하지만 아내는 강박이란 걸 알고 있을 것이다.
- 2020.5.12.화 ‘무위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