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숨쉬기
나는 물이 무섭다. 구병모의 소설 <아가미>를 읽고 갑자기 수영이 배우고 싶어졌다. 마흔을 한창 넘긴 나이에 수영 초급 새벽반을 끊었다. 자세는 언감생심, 물속에서 숨을 못 쉬어 죽을 것 같다. 한 시간 동안 허우적대며 물만 먹고 지쳐서 집에 돌아온다. '아기미'를 가진 소년 '곤'이 되고 싶다.
물 속에서 인간은 호흡을 멈춰야만 한다. 물속 용존 산소만을 필터링하는 아가미는 신비로운 기관이다. 적은 양의 산소만으로도 생체 에너지로 쓸 수 있는 물속 생물들의 생명 메커니즘이 놀랍다. 육지 생물들도 물속에서부터 진화해오지 않았는가. 아기도 엄마 뱃속에 있을 땐 양수에서 최소의 산소만으로 살았던 때가 있었지.
대량의 산소를 기체 상태로 태워 없애는 인간을 비롯한 육지 생물들의 비효율성 때문에 지구 엔트로피가 급상승하고 있다. 며칠 전 아들이 동물로 환생한다면 아빠는 무슨 동물로 다시 태어나고 싶냐고 해서 나는 "1번 새, 2번 물고기"라고 대답했었다.
수영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물속에서도 호흡이 가능하고 물밖에서도 숨 쉴 수 있는 수륙 양용 호흡기를 가진 생명체를 꿈꿔 본다. 귀밑이 간질간질한 것 같기도 하다. 아가미가 생기려나?
- 2017.6.19.월 ‘무위록’ 중에서
인간이 죽는다는 건 버리고버려서 원래 태어나면서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제일 마지막으로 버리는 것이 최후의 날숨이다. 건강했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건 죄라고 여겼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쓰던 내가 항암치료 막바지에 거의 침대에 누워만 지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게 하나 있었다. 숨쉬기.
이불을 코까지 덮고 천천히 숨을 쉬면 숨소리가 들렸다. 한 번의 들숨을 얼마나 길고 깊게 쉴 수 있는지 실험했다. 얼마나 숨을 참을 수 있는지도 연습했다. 날숨이 끝나는 지점에서 숨을 멈추면 숨을 오래 참지 못한다. 들숨이 끝나는 지점에서 숨을 멈추어야 숨을 오래 참을 수 있다.
들숨은 생명의 숨이고 날숨은 죽음의 숨이다. 아기는 들숨을 시작으로 태어나고 노인은 날숨을 끝으로 죽는다. 들숨을 제대로 품어야 날숨을 천천히 뿜어낼 수 있었다. 여태껏 들숨 한번 제대로 품어 본 적 없는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내 숨소리를 오랫동안 집중해서 듣고 있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다. 열 번을 넘어가면 어느 샌가 다른 생각이 끼어들었다. 숨쉬기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냥 행해지는 것이어서 그것을 의식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숨쉬는 소리에 집중하기 쉽지 않았다. 숨쉬는 소리를 오랫동안 집중해서 들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명상이다. 고도의 집중력과 인내가 필요했다.
호홉에 집중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숨은 깊어졌다. 들숨의 양이 많아지자 숨을 멈춘 시간도 점점 길어졌다. 숨이 깊어지면서 몸속으로 들어간 공기는 몸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 공기가 몸속을 여유롭고 자유롭게 만들었다. 마음의 여유가 함께 찾아왔다.
"한편 정상적으로 살았을 때는 에고가 강했는데 병에 걸리면 갑자기 부드러워지고 친절해지고 한결 성품이 좋아지는 사람들이 있다. 정상적으로 살았을 때는 결코 갖지 못했던 얻게 된 것이다. 그들은 내면의 앎과 만족에 다가가고 지혜의 말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병에서 회복되면 에너지가 돌아오고 이때 에고도 함께 되돌아온다… 인간에게는 오래된 기억을 지속시키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이 에너지 장 안에 오래된 감정적 고통물을 지니고 있다. 나는 이것을 '고통체'(업장)라고 부른다… 자신의 관심을 본래의 상태, 즉 시간을 초월한 현재의 순간으로 계속해서 데려오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생각과 감정 대신 '이 순간에 존재함(현존)'이 우리의 정체성이 된다.”
- 에크하르트 톨레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중에서
가질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을 때 무소유를 실천하기가 정말 어렵다. 남아 있는 모든 에너지를 쥐어 짜내봐야 숨쉬기 밖에 할 수 없을 때 느낀 영혼의 충만함을 잊지 못한다. 지금은 자꾸 말하려고 하고, 무언가 하려고 하고, 타인에게 요구하고, 가지고 싶은 것도 많아지고 있다. 그만큼 육체의 에너지가 충만되었다는 뜻이겠지. 지금이 나를 시험해 볼 절호의 기회다. 충만된 에너지를 최소한의 본질에만 쏟아넣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 2018.6.10.일 ‘무위록’ 중에서
어느새 숨쉬기 놀이에 빠져들었다. 숨쉬는 소리 듣는 것이 재미있다니 신기했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생의 조건 속에서 최선의 욕망에 집중하며 살 수 있다. 나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이 숨쉬는 것밖에 없다는 건 오히려 축복의 시간이었다. 한번도 의식하지 않았던 숨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아직 살아있었다.
위장이 빠져나간 자리에 식도가 소장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자세가 구부정했다. 스트레칭을 열심히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단순한 스트레칭은 물리적으로 식도의 길이를 늘려보려는 억지 노력일 뿐이었다. 그럴수록 짧은 식도가 고무줄처럼 저항했다. 통증만 심해지고 위축된 마음은 더 움츠러들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쉽게 펴지지 않던 허리가 숨쉬기에 집중하면서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과학적 메커니즘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숨이 들어간 공간이 생명의 활기로 들어차는 느낌이 들었다. 정확히는 들숨이었다. 들숨이 커질수록 날숨은 더 느리고 길고 완만하게 뿜어낼 수 있었다.
숨쉬기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잡념이 줄어들었다. 숨소리에 집중하느라 다른 생각이 끼어들 자리가 줄어들었다. 처음에는 열 번의 들숨과 날숨에, 다음 일 주일은 스무 번의 들숨과 날숨에, 다음 이 주일은 서른 번의 들숨과 날숨으로 횟수를 늘려갔다. 횟수가 늘어나자 호흡의 길이도 자연스럽게 길어졌다. 길이가 길어질수록 호흡은 깊어졌다. 서은국은 <행복의 기원>에서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라고 했다. 호흡도 똑같았다. 호흡에 집중하는 빈도가 호흡의 깊이를 결정했다. 숨 쉴 수 있어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