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량진 고시원 그 뜨거웠던 여름
어느 누가 손에 잡힐 듯한 금의환향을 마다하겠는가
한번 떠난 사람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며
웃음은 모두 증발해 버린
비린내 대신 짠 내만 가득한 동네
- 전우용 <서울은 깊다> 중에서,
조영석 '노량진 고시촌'
나는 내가 그렇게 남겨졌는데도 장의사가 전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식했고 이렇게 학원과 독서실에 빠지다 결국 나만 더더욱 낙오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시름시름 앓고 있지만 장의사는 어떻게든 적응해서 한해 한해 일산의 아파트값을 블록처럼 쌓으며 살아갈 것이다. 그런 애에게 이 여름의 날들이야 가뭇없이 사라지는 순간들에 불과하겠지. 그러자 마음에 광포함이 들었는데, 그래도 이전으로 돌아갈 순 없다고 속으로 변명했다. 그 밀폐된 독서실로 돌아가 죽어버리라는 누군가의 혼잣말이나 들으며 스물한살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독서실에는 맞은편 자리 재수생만 있을 뿐 모두 집으로 가고 없었다. 걔는 마치 거기에 못박힌 것처럼 정자세로 앉아서 바스락거리는 스낵을 하나하나 집어 먹으며 공부를 하고 있었다… 뭘 틀렸는지 볼펜으로 좍 긋는 소리가 나고 또다시 좍 긋는 소리가 났으며 내가 가방 안에 소지품을 넣고 나가려 할 때 죽어, 그냥, 죽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나가려다 뒤를 돌아보았다. 그 재수생이 마치 핀 조명을 받은 배우처럼 혼자 불을 밝히고 앉아서 그 숱한 문제집들의 정오답에 따라 죽으라고 자신을 냉소하거나 아니면 달콤한 스낵을 입에 넣어 위무하는 과정을.
- 김금희 소설집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우리가 가능했던 여름' 중에서
"중등교사 국어과 79명. 음... 합격생에 이름이 없는 것 같은데요."
합격자 명단을 위에서부터 천천히 다시 훑어 내려오는 담당 장학사의 손가락 끝을 내 눈은 초조하게 따라갔다.
"그럴리가 없는데... 분명히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는데요..."
당당히 합격증을 받으러 교육청을 방문했던 나는, 순간 풀이 죽고 목소리는 기어들어갔다.
"아, 찾았다. 여기 있네요."
손가락이 명단 제일 마지막에서 멈췄다. 컷트라인. 장학사가 나를 쳐다보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내 감정은 안도에서 놀람으로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꼴찌 합격이라니. 내 교직 생활은 이렇게 운명처럼 시작되었다.
1997년 12월 3일, IMF는 우리나라에 구제금융 지원을 승인했다. 졸업을 앞둔 나는 신문기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해 글쟁이가 되고 싶었다. 글의 힘으로 세상에 내 존재를 증명하고 싶었던 글쟁이 특유의 허영끼는 중학생 때부터 시작되었다. 작가가 되어 밥벌이를 할 수 있을 만큼 용기와 재능은 없었다. 글 써서 밥벌이 할 수 있는 직업이 기자였고 대학 졸업하는 순간까지 변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는 영화에 미쳐 영화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싶기도 했고 방송 PD도 되고 싶었다. 구제금융 사태로 신입사원을 뽑는 곳이 전무했고 앞으로의 상황도 암흑천지였다.
한참 연애 중이었던 지금의 아내가 나를 설득했다. 선배에게는 한 장의 카드가 더 있지 않느냐고. 교원자격증이 있으니 임용고사에 도전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교사가 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 나는 사범대가 아닌 일반대 국문과 학생이었다. 비사범대학에도 교직을 이수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던 거의 마지막 세대였다. 성적도 나쁘지 않았고 교육학 수업을 듣고 싶다는 호기심과 충동, 수업과 시험을 감당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으로 교직을 이수했고 자격증이 생겼다. 교원자격증은 장롱 깊숙히 쳐박아둔 운전면허증과 같은 것이었다. 사범대 가산점도 없었고 시험정보도 없었다. 비사범대 학생이 임용을 합격한 전례도 거의 없었다. 내게 임용시험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무엇보다 기약할 수 없는 터널같은 시간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선택지가 없었다. 1999년 여름 초입, 커다란 스포츠백 한가득 임용고사 문제집을 챙겨 둘러메고 노량진 고시촌으로 들어갔다. 겨울보다는 여름이 덜 서럽다며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몸 누이면 가득 차는 한 평 반의 고시촌 쪽방의 어둠에 숨이 막혔다. 낮인지 밤인지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알람시계 뿐이었다. 낮이라서 활동하고 밤이라서 잠자는 동물적 생체리듬이 그리웠다. 고시원 건물 옥상은 시간을 감각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옥상 간이막사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했다. 텁텁한 에어컨 실외기 옆에서 머리를 말리며 담배를 피우는 게 유일한 안식의 시간이었다. 식당에서 혼자 밥 먹으면서 감옥을 탈출한 신출귀몰 신창원이 잡혔다는 속보를 보았다. 감옥이 견디기 힘든 건 시간이 표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고시원도 감옥과 다를 바 없었다.
난생 처음 불면증을 경험했다. 새벽 5시 반에 교육학 학원 강의실에 좋은 자리를 잡으려면 일찍 자야 했다. 공부 목표량을 채우지 못해 불안했지만 잠을 자야만 했다. 불을 끄고 누우면 째깍째깍 시계소리만 들렸다. 시각이 죽은 시계 소리는 정신을 미쳐 날뛰게 만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스탠드를 켜고 시계를 보면 언제나 새벽 4시였다. 2시에 누웠으니 2시간을 뒤척였다. 뒤척임의 시간이 계속 되자 자는 것을 포기했다. 밤을 꼬박 새워 공부하고 새벽에 학원 수업을 들으러 갔다. 오전 수업은 쏟아지는 잠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노트 빌려 줄 친구 하나 없었기 때문에 졸 수도 없었다. 까실한 입 속에 점심밥을 우겨 넣고 옆 동네 학원에 전공 수업을 들으러 지하철을 탔다. 학원 자습실 입구에 '노트, 교재 분실 주의!'라는 문구가 붙어있었다. 아이들 가르치는 교사가 되겠다는 작자들이 도둑질도 서슴치 않았다. 시대는 언제나 젊은이들을 극한으로 몰아 넣었다.
어느 주말, 밤을 새고 옥상에서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건물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학원 앞에 3열로 사람들이 인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제 저녁부터 시작된 줄이 밤새 끝없이 길어져 있었다. 저 줄의 정체가 뭘까 궁금했다. 줄선 사람들의 연령도 다양해서 정체를 좀처럼 가늠할 수 없었다. 아침 먹으러 내려가는 길에 궁금해서 줄 선 중년 여자에게 줄의 정체에 대해 물었다. 재수 학원 등록 하려고 번호표를 받고 가족들이 돌아가며 줄서서 밤을 새우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저 또래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겠다고 희망없는 줄을 선 또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다. 서울 노량진 고시촌의 풍경은 공시생과 사시생, 임용고시생, 재수생들이 불안한 미래와 고투 중인 약육강식 정글의 집약판이었다.
더 이상은 무리였다. 몸무게가 58kg에서 52kg로 빠졌다. 이대로 더 있다가는 시험치기 전에 쓰러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짐을 싸야 했다. 그렇게 고시촌 동굴 생활은 짧은 2개월로 끝을 맺었다. 2년 같이 느껴졌다. 시험을 3개월 앞두고 집으로 내려와 동네 독서실로 들어갔다. 평일 독서실은 나 혼자 뿐이었다. 학생들은 학교에 가고 공시생들은 동네 독서실에 오지 않았다. 완전하게 혼자였다. 휴게실 넓은 테이블에 교과서와 참고서, 논문과 교육학 서적, 조동일 <한국문학 통사> 여섯 권을 펼쳐 놓고 나만의 정리 노트 만들기에 집중했다.
생각은 점점 단순해졌다. 내가 아이들에게 필요한 사람인가는 운명의 신이 결정할 것이었다. 다만 내게 그런 자리가 허락된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헛소리하는 사기꾼은 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과 기본은 제대로 알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자기 공부에만 열중했다. 그렇게 정리한 노트가 대학 노트 열세 권이 완성되었다. 내가 믿을 건 이것 밖에 없었다. 원서 접수했느냐는 후배의 연락이 없었으면 원서 접수 날짜도 놓칠 뻔했다. 철저히 혼자된 은둔자의 생활이었다. 선발 인원이 가장 많은 경기도로 원서를 내러 간다는 후배에게 원서 접수를 부탁했다. 그리고 내가 사는 도내에도 원서를 냈다. 경기도에 시험을 보겠다는 결정을 하고 시험 이틀 전 후배에게서 받은 접수증을 찾았다. 귀신 곡할 노릇처럼 접수증이 사라졌다. 접수증이 어디에 갔는지 오리무중이었다. 마음의 결정이 쉬워졌다. 경기도 시험을 접고 도내에 시험을 치기로 마음을 바꿨다. 시험은 공부한 만큼만 열심히 쓰고 나왔다.
"축하해요 선배, 1차 시험 합격..."
"뭐라고? 거짓말. 선배 놀리지 마라. 혼난다."
"홈페이지 확인해 보세요."
기대도 않고 있다가 엄마랑 시장보고 오는 길에 합격 통보를 받았다. 믿기지 않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자 2차 시험, 논술과 면접은 더 욕심이 났다. 조바심이 쳐졌고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무신론자지만 매일 신에게 기도했다. 나를 아이들 앞에 보내 주신다면 성심을 다하는 교사가 될 것이며 허락하지 않으신다해도 준비가 안된 것이니 받아들이겠노라고... 그해 임용 공부 시작하자 마자 엄마는 심장병 수술을 했다. 그때도 나는 신을 찾았다. 그해 나는 세상의 모든 신을 찾았고 가장 독실한 신자였다.
최종 합격을 남겨 놓고 남자들의 무임승차 티켓인 공무원 군가산점 위헌 판결이 났다. 똑똑한 이화여대 학생들이 소송냈다는 소리를 들었다. 드디어 올것이 왔다고 생각했고 결과는 이미 예견되었다. 여자들이 절대적으로 많은 국어교사 임용 시험에서 군가산점 삭제 사건은 절망이었다. 나의 운은 여기까지구나. 그래도 최선을 다했고, 내 생에 가장 뜨거운 여름과 1년을 보냈으니 그것으로 됐다고...
자기 경험담을 이야기하는 사람만이 믿음을 품고 있다. - 유고 비평집
나는 교육을 대단치 않게 생각합니다. 교육이 인간을 변화시키고 개선할 수 있다고 믿어 본 일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 대신 아름다움과 예술과 문학의 부드러운 설득력은 어느 정도 신뢰해 왔습니다. 내 자신도 어린 시절 공립학교나 사립교육기관보다는 문학을 통해 더 많은 교양을 쌓았며 정신의 세계에 호기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 편지
- 헤르만 헤세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중에서
교사로서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나는 사람에게 교육적 영향을 주는 것에 대한 믿음이 강하지 않다. 그래서 교육에 대한 기대는 소박하다. 게으름에 대한 자기 변명일지도 모른다.
- 나의 첫 공동 저작 <쌤, 뭐하세요?> 중에서
나는 어느덧 헤세를 닮아 있다. 아포리즘 글쓰기, 멈추지 않는 자기 탐구, 삶과 인생의 관조, 사랑…
하지만 교육의 힘을 믿지 않는다는 비슷한 생각에서 교사인 나는 지독한 모순에 빠진다. 교육의 힘을 믿지 않고 교사를 할 수 있나? 20년 넘게 해 온 교사로서의 내 삶은 위선이었단 말인가? 오히려 교육에 대한 욕심이 너무 커서 채워지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의 표현일까?
헤세의 교육에 대한 불신의 뿌리는 자신의 유소년기 경험에 맞닿아 있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소설이라기보다 자서전의 느낌이 강하다. 그 시절 나 또한 학교와 교사를 불신했다. 나는 교사는 절대 되지 않을 거라 다짐했었다.
수시원서를 준비하는 고3 교실, 수업시간에 그 시절의 내 경험을 아이들에게 얘기해 주었다. 그 시절 나는 기자나 작가가 되고 싶었고, 꾸준히 기자 시험 준비했던 대학 시절 얘기. 그리고 졸업 즈음 터진 IMF 외환위기와 임용고사 준비와 합격까지… 말 하면서 나는 교사로서의 내 삶을 돌아보고 있었다.
공부 시작한지 1년만에 합격했다는 말에 아이들은 '와'하고 탄성을 질렀고, 그것도 그해 꼴찌, 커트라인으로 붙었다는 말에 웃음을 빵 터뜨렸다. 올 한해 수업시간 차곡차곡 나갔던 문법 정리 자료들이 그때 노량진 고시촌에 쳐박혀 외롭게 공부했던 노트를 계속 업그레이드 하면서 만든 세상에 단 하나 뿐인 특별한 자료라고 자랑했더니 아이들은 존경스런 눈빛을 보낸다.
노력과 행운, 우연과 필연이 절묘하게 반반 섞인 교사의 길이었다. 그래도 나는 후회없노라고 위안도 했다가, 현재의 나태함을 숨고르기라고 변명도 했다가, 앞으로 남은 교사의 길은 어떤 모습일까 그려 본다. 헤세의 말처럼 오늘 아이들에게 한 이야기는 나의 경험담이라서 믿음을 품고 있다.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진지하게 듣고 있는 한 명의 여학생과 눈을 맞추며 진심을 담아 말한다.
"얘들아, 인생은 등급이 아니고 방향이란다!"
나는 그다지 세상을 따뜻하고 긍정적인 곳으로 보지 않는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항상 위기 속에 기회는 숨어 있었다. 준비된 삶의 태도는 위기에서 나를 구해 주었다. 교사의 길이 그러했고 위암 수술이 그러했다. 지금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진행형으로 살아내고 있다고. 나는 국어 선생이 되어 글을 쓰고, 문학과 글쓰기를 가르치고, 방송반 아이들과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들고 있다. 교사는 내 꿈을 모두 이루게 해 준 기특한 직업이라는 걸 문득 깨닫는다.
그리고 헤세의 아포리즘 문장을 발견한다. 인생은 필연같은 기막힌 우연의 연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