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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Sep 08. 2021

출소번호 1733

... 예습태만죄




14번.
오늘은 넘어갔다.
14일인데 14번을 시키면 너무 뻔하니까, 24번.
그럴 리 없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어는 나인 줄 몰랐다는 듯 오, 하며 놀란 척을 한다. 가증스러운 저 얼굴에 필통을 던지고 싶다. 책을 들고 한참 책상만 보고 있었다. 국어는 말했다.
읽어.
읽기를 시도하고 실패했다. 말하려고 애썼지만 잘되지 않았다. 더듬고 또 더듬었다. 더듬다가 입수를 꾹 다물었다. 국어는 말했다.
천천히.
읽을 수 없는데 어떻게 천천히 읽나. 차분하게 읽으면 읽어져? 다리 부러진 사람한테 심호흡하고 다시 달려 봐, 하는 것과 뭐가 달라. 다시 더듬었다. 또 더듬고 또 더듬다가 고개를 숙이고 만다. 힘들다... 국어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야, 야, 똑바로 읽어. 정확하게.
친구들이 킬킬대며 웃었다. 국어는 교탁을 손으로 탁탁 때렸다.
야, 야, 니들 이런 걸로 웃으면 안 돼. 괜찮아. 차분하게 해.
비웃음보다 그 말이 더 싫다. 더는 시도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욕 나오려는 걸 참느라 맞물린 입술이 찢어질 것 같다. 국어는 턱을 손에 괴고 입술을 앞으로 쭉 내밀며 다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시간 많다. 시간 많아.
그 시간은 5분쯤 됐을 것이다. 국어가 짬을 내서 옷에 묻은 보풀을 테이프로 뜯어내고 친구들이 하품을 하거나 교과서 귀퉁이에 낙서를 한, 그 짧은 시간이 내게는 너무나 길었다. 혀를 씹고 안쪽 살을 씹었다. 됐어, 라는 신호가 떨어졌고 나는 무너지듯 의자에 앉았다.
- 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 중에서




"오늘이 14일이지 그래도 33번. 지문 읽고 독해해 봐."


OO고등학교 2학년 1반 33번. 유독 33번을 좋아하는 남자 영어선생이 한 명 있었다. 다른 교실에서도 33번을 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교실에 들어와서 처음 부르는 번호는 언제나 내 번호 33번이었다. 처음 몇 번은 그냥 입에 익은 번호라서 그랬거니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입에 익은 것이 아닌 의도된 번호 부르기라는 것에 확신이 갔다.

영어실력이 온전치 않아 예습 없이 기본실력으로 독해해내기는 무리였다. 그렇게 무안을 몇 번 당하고 난 뒤 나는 철저하게 예습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발표울렁증이 발목을 잡았다. 이것은 고질병 같은 것이었다. 새 학기 첫 수업, 자기소개 시간이 가장 싫었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을 꺼렸고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았다. 학생시절 16년 동안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이 한번은 해본다는 학급반장은 커녕 청소반장도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영어시간 시작 전부터 심장은 서서히 두방망이질을 시작했다. 어김없이 33번이 지명됐다. 일어서서 영어문장을 읽는 내 목소리는 메아리의 울림처럼 울렁울렁 춤을 추고 갈라졌다. 심장이 밖으로 나가려는 목소리 뒷덜미를 잡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를 수록 머릿속은 하얘졌다. 목소리가 줄어들다가 작아지다가 어느 순간 멈췄다. 그리고 더 이상 입은 열리지 않았다. 반항하는 아이의 침묵처럼… 참다 못한 영어는 표정이 일그러졌다. "됐다, 앉아."라는 차기운 멈춤의 명령으로 상황은 종결되었다.

심장박동이 극한을 찍고 나면 어지러운 현기증이 일었다. 이대로 영원히 잠들고 싶은 수면 욕구도 찾아왔다. 독해를 끝까지 완성한 날은 한번도 없었다. 이렇게 약한 심장의 소유자로 나를 낳아 준 어머니를 원망했다.


나는 자존심이 강했다. 나는 영어 문장과 우리말 해석을 거의 외우다시피 준비했다. 준비를 많이 할수록 심장은 거지말처럼 나의 의지를 배신했다. 영어의 33번에 대한 애착은 언제까지 네가 예습 안하고 버틸 수 있나 하는 고집 같은 것이었다.

교실에 들어오면 "어디 보자, 오늘은 33번이 한번 해볼까"하며 마치 처음 들어온 교실인 양 가증스러운 웃음과 함께 나를 불렀다. 번호가 불리기 전 아이들은 나를 응원하는 것인지, 조롱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며 영어보다 먼저 "33번, 오늘도 33번, 히히…" 하며 내 번호를 쑥덕거렸다. 아이들의 그런 반응이 더 싫었다.  

자존심과 오기로 예습을 빠지지 않고 했지만 번번이 패배하는 쪽은 나였다. 교실에서 혼자 외따로 버려진 벌거숭이가 된 느낌. 영어는 그 수 없이 부른 33번의 나날 중에 내 이름을 단 한번도 부르지 않았다. 영어의 머릿속에 나는 지독하게 예습 안 해오는 죄수번호 2133이었다. 영어는 내 이름을 영원히 몰랐다.


영어는 나의 고질적인 병을 알고 있었을까? 그랬다면 영어는 눈물겨운 제자 사랑을 실천한 고마운 스승이다. 발표울렁증의 최고 치료법은 많이 부대껴서 깨져 보는 것이라는 것을 지금의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야, 33번 너도 참 대단하다. 이 정도 시켰으면 한번쯤 예습해와야 되는 거 아니야?" 영어는 예상이 어긋날 때마다 혐오에 쌓인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어떤 변명도 할 수가 없었다.

영어 든 날은 지옥이었고, 수치심과 자괴감에 온종일 치를 떨어야 했다. 그때 보여 준 영어의 태도는 나를 위한 것이었을까, 자기를 위한 것이었을까? 나는 아직도 그 의문 부호를 지우지 못했다. 영어는 그때의 나를 기억이나 할까?

김OO 영어선생님 잘 지내시는지요? 그때 예습 지독하게 안 해오던 학생이 국어선생이 되었어요. 이렇게 어설픈 어른이 되었답니다.




나는 학교 선생을 직업으로 꿈꿔 본 적이 없었다. 어찌어찌 나는 국어 선생이 되었고 학생을 번호로 부르지 않는다. 이름을 모르면 그 자리에서 이름을 물었고, 미리 이름을 봐 두었다가 이름을 불렀다. 웬만하면 새 학기 일 주일 안에 명렬을 들고 다니면서 집이고 학교에서 짬짬이 전교생들의 이름을 거의 다 외웠다. 담임을 맡으면 얼굴 보기 전에 이름은 미리 외웠다. 학생 이름 외우기는 트라우마가 안겨준 나의 장기가 되었다.


OO중학교, 우리 반 근수는 발성장애를 가진 학생이었다. 수업 시간 책을 읽을 읽거나 발표할 일이 생기면 나는 근수의 의견을 물었다. "읽어 볼래? 싫으면 안 읽어도 돼." 근수는 어떤 날은 해보겠다고 했고 어떤 날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내가 억지로 고쳐주려 하지 않아도 어른이 되면 스스로 치료하든지 자연스럽게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다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으로 마음의 상처를 얻어 트라우마를 갖지 않게 도와주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확신은 없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고등학교 동문 체육선생님을 따라 다닌 조기축구에서 받은 등번호가 33번이었다. 우연히 받아든 번호를 보고 나는 크게 웃었다. 지금 나는 33번을 사랑한다. 그때의 나도.



*학생 이름 '근수'는 가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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