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쓰기반 작가지망생 오총사 이야기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대개 목수는 언제나 목수로 남아 있었고 군인은 언제나 군인이었으며 교사나 상인도 그들의 빛깔을 바꾸지 않았다. 일단 한 직업을 가진 자들은 결코 변화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어떤 형태든지 직업을 가진다는 것은,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깊고 고요한 서재 한가운데에 웅크리고 앉아서 책은 전혀 펴보지도 않은 채 하루 종일 연필이나 깎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면서 자신이 몹시 지적인 직업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직업을 가지고 사회에 봉사하는 것보다 책을 읽고 싶었다.
마흔 살까지는 생계를 위해서 필요한 돈을 버는 이외의 시간은 오직 혼자서 책을 읽으며 공부할 것이다. 마흔 살까지는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한눈팔지 않고 공부할 것이다. 마흔 살까지 나는 오직 공부에만 미칠 것이다... 그렇게 읽은 모든 책들에 대해서 독후감을 쓸 것이다... 그러다 이윽고 마흔 살이 되면, 그때 나는 스스로 만든 대학을 졸업할 것이다. 그때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선명한 존재가 되어 있음을, 나는 의심하지 않겠다.
- 배수아 <독학자> 중에서
그녀는 현준에게 자신도 소설을 쓴다고 털어놓았고 살짝 눈을 치켜뜬 그에게 자신의 글을 읽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보라가 현준으로부터 받은 첫번째 답은 달랑 한줄이었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현준의 간단명료하고 직설적인 평가는 보라를 당황하게 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 말은 보라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그뒤로 보라는 현준에게 자신이 고민하고 괴러워하는 것, 자신이 쓰는 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씩 털어놓기 시작했다. 삶과 글쓰기에 관한 고민을 최대한 촌스럽지 않게 표현하기 위해 보라는 신중을 기했고 그래서 현준에게 보내는 이메일을 작성하는 데에는 늘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이에 반해 현준의 답은 언제나 짧고 강렬했는데, 이것은 고민이 아니다,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직접 인물 속으로 들어가라, 글에는 주제가 있어야 한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이미 모든 답은 네 안에 있다 따위로, 따지고 보면 누구든 뱉어놓으면 그만인 말들이었다. 하지만 보라는 현준이 던져준 부연 없는 명제들을 안팎으로 집요하게 사색함으로써 많은 공부를 이뤘다. 물론 이는 현준이 훌륭한 선생이러서가 아니라 보라가 성실한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 공부가 계속될수록 보라는 내면에 흩어져 있던 무언가가 서서히 응집되어 단단해져가는 느낌을 받았으며 자신이 여태까지 한번도 하지 못했던 것을 곧 할 수 있게 되리라는 예감 또한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다.
그동안에 성찰이 이루어낸 새로운 결과를 짜잔, 하고 공개함으로써 자신의 문학적 스승-이라고 그녀는 그때 생각했다-에게 칭찬을 받고 싶었기 때문에, 보라는 현준에게 새로운 소설을 쓴다는 이야기를 그동안 한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제 무언가가 달라져 있었다. 새로운 종류의 매력적인 공포를 경험한 바로 그날 밤, 보라는 여태까지 쓴 미완의 이야기와 함께 자신이 당면한 벽에 대한 고백을 현준에게 이메일로 보냈다.
...천천히 숨을 내쉬며 마침내 이 어린 작가는 첫 독자의 코멘트를 열어보았다.
엉성하고 재미없다. 입시에 매진하는 게 좋겠다.
그게 전부였다...
현준의 부고를 접했을 때 윤석은 그날의 만남을 애잔한 마음으로 떠올렸지만 그때조차 현준이 던져준 중요한 키워드인 '마지막'과 '가능성'이라는 단어에 포함된 복선, 즉 그가 새로 쓴 소설을 이메일로 보내겠다고 했던 이야기는 기억하지 못했다.
- 손원평 소설집 <타인의 집> '문학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그거 하면 생기부 좀 알차게 되나요?"
생기부 타령하는 아이들이 있다. 응, 그럴 생각이면 나도 사절이다. 하지마! 하고 말하고 싶지만,
"방과후 수업은 생기부에 기록할 수 없구요. 혹시 인연이 돼서 내년에 나랑 국어시간에 만나고 글쓰기를 꾸준히만 한다면 여러분들의 글쓰기 활동을 교과세특에 기록할 수는 있겠죠. 하하." 하고 말한다. 나는 대한민국의 친절한 국어 교사니까.
'나를 찾아 떠나는 글쓰기 교실'. 이번에는 글쓰기를 표방하는 제목을 붙였다. 역시나 신청 학생이 거의 없다. 동아리 시간에 도서부와 교지편집부를 뛰어다니며 구걸하 듯 글쓰기 방과후 교실에 들어오라고 홍보한다. 어제 오후 일등으로 자기 의지로 달려온 교지편집부 윤소원을 빼고는 더 이상 신청자가 없다.
나는 '작가'라는 타이틀이 없다. 아직까지 내 이름 뒤에는 '선생님'이 붙는다. 가르치는 사람. 작가도 아니면서 글쓰기를 가르치는 사람. 학생이 쓴 글을 평가한다. 나는 정작 두려워서 누군가의 평가를 피하는 영원한 작가지망생이다. 소설 속 '현준'처럼.
가끔씩 학교에서 작가에게 강연을 부탁하기도 한다. 글 잘 쓰는 것과 잘 가르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교사와 작가는 전혀 다른 길이다. 나는 교사라는 직업에 몸 담고 있으면서 작가의 세계를 기웃거리며 어정쩡하게 걸쳐있다. 이 어정쩡함이 글쓰기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나의 장점이다. 반면 작가의 세계로 몸과 마음을 온전하게 던지지 못하는 한계이기도 하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지 3개월이다. 브런치 글 속에 나는 교사라는 캐릭터를 지우고 싶었지만 실패했다. 실패한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 답이 간단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교사라는 직업적 가면을 벗고 나면 결국 나는 할 이야기가 별로 없는 사람인가? 그렇다고 학교 이야기를 차갑거나 뜨겁게 쓰지도 못한다. 에세이의 한계를 계속 느끼고 있다. 소설을 써야 할까? 나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고 지금도 그 마음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미 얼치기 작가처럼 행세한다는 점에서는 '윤석'의 허영을 닮았다. 그리고 나는 이번 글쓰기반에서 소원이의 글을 평가하고 글 잘쓰는 방법을 가르치게 될 것이다. 글쓰기는 누군가에게 배우고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가는 영역이다. 독학자들의 세계. 나는 이번 수업에서 단 한명의 '보라'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글쓰기를 가르친다는 건 단 한명의 '보라'를 찾아내는 일이다. 나는 또 실망할 것이다. 글쓰기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하고, '글쓰기란 무엇일까'하고 '영원히 질문 자체로 존재하는 질문'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김영주 선생님도 내게 종종 그런 말을 했었다. 대학에 들어가게 되면 네가 사유한 것들에 대해서 기록을 남겨라. 그것이 나중에 네가 스스로 너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가 되어 줄 것이다, 하고. 내가 P교수에게 썼던 편지는 그 행위의 시작이었다.
- 배수아 <독학자> 중에서
인간이 좌초되지 않으려면, 자신을 바라보며 살아갈 필요가 있다. 그럴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다. 자신이 제 인생이라는 연극의 배우라고 설정하고 감각하면서, 하루하루 매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다.
인생은 자신 안에 갇혀 사형수로 살 만큼 대단한 의미가 있지 않다. 이것은 우울하게 확 죽어버리기 위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그 어떤 경우에도, 제 삶을 끝까지 나름 보람있게 공연한 뒤 사라지기 위한 지혜다. 정교한 허무주의는 아름답다.
- 이응준 <작가는 어떻게 생각을 시작하는가> 중에서
일기, 매일매일의 기록.
"남에게 보여주지 않을 일기에서조차 솔직해지기 어려운 이유가 뭘까?" 방과후 누리 교실 '나를 찾아 떠나는 글쓰기반'에 찾아온 아이들 세 명에게 물었다.
준효, "자신을 객관화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요." 헉, 객관화. 이녀석은 뭐지?
소원, "써놓고도 진짜 솔직한 내 모습일까 의심이 들어요." 오우, 제법인 걸.
지윤, "혹시 엄마나 친구들이 보게 될까봐서요." 그래, 넌 제대로 솔직하구나.
질문 하나 던져 놓고 아이들 대답에 속으로 놀라고 감탄한다. 아, 이 녀석들 고등학생들이지. 이 정도 대답들은 할 수 있어.
아내는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니 어린이들 얘기를 하고, 아들은 중학생에, 몇 년 전까지 중학교에서만 17년 근무했다. 지금 학교에선 고3들을 상대하고, 딸도 고3에, 내 앞에 글쓰기 배우겠다고 앉아있는 이 녀석들은 고1, 고2들이다. 그러고 보니 참 다양한 연령층의 학생들을 만났다.
내 안에 아이들은 연령과 발달 단계가 뭉뚱그려져 있다. 어린이들 얘기 하고 있는 아내 앞에서 고등학생 예를 들고 있고, 중학생들 앞에서 얘들은 아무것도 모르지 하고 말했다가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고등학생이면 이 정도는 알겠지 하고 말하고 행동을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경우도 많다. 아이들이란 존재가 원래 들쑥날쑥 한 건지, 이 나이 먹도록 내가 감을 못잡고 있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하긴, 나도 나를 잘 모르겠으니까 말이다. 스스로는 어른으로 의심치 않다가 가끔씩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내면아이 때문에 한없이 부끄러워질 때도 있다.
"이번 글쓰기반에선 자기의 문장을 '쓰기 위해서' 타인의 문장을 읽을 거야. 좀 극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쓰기 위해' 독서를 해."
"선생님, 그건 책을 좀 편협하게 읽는 건 아닐까요?"
"좋은 질문인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글쓰기는 편협을 완성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아, '편협의 완성'이란 말도 이갑수의 소설 제목이구나. 자기 편협 속으로 내밀하고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는 지겨운 시간과 싸우는 거... 작가도 자기 편협을 완성한 것일 뿐이야. 그러니 작가의 편협 속에서 나의 편협한 생각을 길어 올리는 게 독서야. 나는 그렇게 책을 읽을 때 재밌더라구."
"선생님, 어려워요."
"이제부터 그 방법을 공개할께."
"글쓰기반 과정은 두 가지만 지키기로 하자. 하나는 매일 한 문장이라도 무조건 쓰기. 두번째는 한 시간에 한 명씩 '나도 작가'가 되는 거야. 그날 지정된 작가의 호칭은 당연히 '작가님'이고 작가님의 글을 읽고 와서 한 시간 동안 질문하고 생각을 얘기하는 거지. 이를테면, '작가 초대 토크콘서트'. 어때 재밌겠지?"
"재밌겠는데요." 소원이의 눈빛이 빛난다.
"다음 시간엔 선생님 제본한 일기책을 들고 와서 보여줄께. 선생님 일기는 비밀 일기가 아니고 공개된 글이야. 그리고 시작한 지 3개월밖에 안 됐지만 내 브런치에 초대할테니 몇 명 되지 않는 구독자가 되어 줘. 너희들은 내 첫 학생 구독자가 되는 거야. 이 수업과정이 끝나더라도 너희들이 원한다며 우린 계속 만날 것이고 너희들을 브런치 작가로 등단시켜 주는 걸 선생님의 일차 목표로 삼기로 했어. 선생님은 등단한 작가도 아니고 글을 잘 쓰는 사람도 아니야. 하지만 꾸준히 멈추지 않고 써왔고 앞으로도 계속 쓸 거라는 건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 과거에 작가였거나, 미래에 작가가 될 사람은 없어. 작가는 현재 쓰는 사람일 뿐이야. 그렇게 본다면 선생님은 현역 작가 맞지. 하하하."
"우리, 일기부터 출발하자."
우리 수업의 핵심 컨셉트는 '일기 읽어주기'다, 라고 못박는다. 시범으로 어제 버스기다리며 '치매노인이 되어도 글을 쓸 수 있을까?'라는 상상 메모를 읽어 준다. 아이들은 자기 일기를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읽어 준다고, 하는 표정을 짓는다. 어? 재미있네 같은 표정 같기도 하고, 이 선생님은 뭔가 하는 표정 같기도 하다. 약간 놀란 표정은 분명하다. 나는 속으로 너희들은 일기 교육을 잘못 받은 거야, 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둔다. 그건 누워서 침 뱉는 일이다. 나도 이걸 스스로 터득하는데 40년이 넘게 걸렸다. 자기만을 위한 글과 타인에게 공개하는 글의 경계가 없어지는 날, 글은 날개를 단다.
이것은 순서의 문제이고 시간의 문제이다. 대부분 글 쓰려는 자들은 자기 세계가 단단하게 구축되기까지 기다리지 못한다. 단단하게 쟁이고 쌓아 가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생각과 문장의 파편 조각을 깎고 다듬어서 빙산의 일각만을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이 글쓰기이다. 말라 있는 우물 바닥을 박박 긁어 목마른 사람들의 목을 축여주겠다는 과욕을 부리다가 실패한다. 자기는 작가의 재능은 없는 것 같다고. 작가의 재능은 '시간을 견디는 힘'이라고 나는 믿는다. 글쓰는 사람은 모두 작가다. 다만 현재 쓰고 있는 사람만 작가다. 그렇게 버티는 현재의 시간을 쌓아놓은 자만이 진정한 작가다.
최종적으로 글쓰기반 최정예 멤버 네 명이 모였다. 소원, 지윤, 지영, 준효, 그리고 나. 우리 작가지망생 오총사가 맺어진 날이다. 이렇게 또 다른 인연을 맞이한다. 교사하는 재미고 보람이다.
나는 내 인생 연극의 배우이면서 연출자다. 내가 정교하게 짜놓은 스토리와 동선을 따라 나는 혼신의 연기로 나아간다. 내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그 어떤 배역도 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내가 부여해서 내가 맡게된 배역에서 새로운 '캐릭터'가 된다. 모든 배역들이 '나'이지만, 그 어떤 배역도 진짜 '나'가 아니다. 나는 하나의 '캐릭터'일 뿐이다. 그렇게 가볍지만 진지하게 질펀하게 놀다가 가기로 한다.
이번 글쓰기 교실의 캐릭터는 글쓰기를 가르치는 국어 선생이 아니라 온전하게 아이들과 '문우文友'가 되는 것이다. 작가지망생 '보라'를 찾듯이… 너의 글은 유리처럼 투명해서 순수하다고, 그 순수함을 닮고 싶어. 너의 글은 거울처럼 날카롭게 반짝여서 나를 비춰 보게 된다고, 그래서 고마워. 그리고 부끄럽지만 내 글도 좀 봐 줄래? 그리고 '마지막'일지도 모를 '가능성'을 판단해 주겠니? 너의 의견을 듣고 싶어.
여기까지 써놓고…
며칠이 지난 어느날…
점심 시간, 급식소에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고 3학년 부장과 나, 둘만 남았다. 부장은 얼마전 우연히 나와 인연이 있는 중학교 제자를 만났다고 했다. '감수성쟁이들의 시심통통' 시 창작반이 떠올랐다. 제자는 국문과에 진학했다고 한다. 중학교 때 시 창작반 때의 추억이 너무 좋아서 잊지 못한다고 얘기했단다. 이미 나를 거쳐간 수많은 '보라'가 있었지.
방송반 아이들이 영상 영화 계통으로 진학하고, 글쓰기반 아이들이 문학을 전공할 때 여러가지 감정들이 교차한다. 내가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기보다 자기들이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따라가다 우연히 나를 만난 것일 뿐이다.
그럴 땐 보람보다 두려움이 앞선다. 교육의 힘을 믿지 않는 교사의 영향을 조금 받고도 아이들은 씩씩하게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난다. 나는 아이들이 가는 길에 잠깐 만나 영감을 준 '행인1'이길 바란다. 나로 인해 아이들의 여로가 굴절되지 않길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