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놀이'와 '생존'의 경계에 서다
호모 루덴스는 ‘노는 인간’ 또는 ‘놀이하는 인간’을 뜻한다. 요한 호이징하(Johan Huizinga, 1872~1945)는 1938년에 출간한 『호모 루덴스(Homo Ludens)』에서 놀이는 문화의 한 요소가 아니라 문화 그 자체가 놀이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역설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학 오기전 동네에서는 이 놀이를 '오징어 땅콩'이라고 불렀고, 전학온 부산에서는 '오징어 달구지'라고 불렀다. 땅콩은 오징어의 친구라서, 둘은 모두 맥주와 친구라서… 달구지는 ㅁ과 아래 ㅇ이 오징어를 실은 수레를 닮아서… 근거는 모른다. 편을 가르고 공격측에서 "오징어"라고 외치고 수비쪽에서 "달구지(또는, 땅콩)"라 외치면 게임은 시작된다. 규칙은 차이가 거의 없었다.
오징어 허리를 가로질러 '자유의 강'을 건너면 깽깽이 발에서 두발로 돌아다니는 이동의 자유를 얻는다. 그것을 이전 동네에서는 '암행어사'라 불렀고 이 동네에서 말그대로 '자유'라고 불렀다. 새로운 동네로 왔어도 놀이에 익숙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두발로 이동해서 다닐 수 있는 '자유' 상태에서 나는 천하무적이 되었다. 깽깽이 발로 힘겹게 뛰어가는 아이를 향해 쌩 달려가 등을 밀쳐버리면 아이는 흙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매우 거칠고 위험한 놀이였다. 전투적이고 호전적이기까지 한 생존 싸움판 놀이였다. 한 순간도 방심하면 등 뒤에서 발차기가 날아왔고, 선 안팎에서 옷을 잡아채였다. 옷이 찢어지고 코피가 나고 무릎이 까졌다. "너 또 오징어 놀이 했지. 옷이 그게 뭐니, 이으그 내가 못살아." 집에 들어가면 엄마에게 거의 매일 혼났다.
덩치가 크고 힘이 좋거나 날쌔고 빠른 아이들이 인기가 많았다. 편을 가를 때 손바닥을 업고 뒤집어 편을 가르는 종목이 아니었다. 힘있는 아이들이 우연히 모두 한편으롤 몰리면 게임은 싱겁고 재미가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편가르기는 드레프트 지명 방식이었다. 이 놀이를 가장 잘하는 아이 두명이 가위바위보를 해서 한명씩 데리고 갔다. 나는 항상 맨 마지막에 지명받는 아이였지만 놀이에서 빠지지도 소외되지도 않았다. 약한 자가 살아남는 나름의 방법을 알고 있었다.
'혼란을 틈타라'
'전투의 클라이맥스에 기회가 있다'
'강자의 눈에 약자는 보이지 않는다'
'덩치 큰 아이 뒤를 따라 다녀라'
'자유의 몸이 되는 걸 지상과제로 삼아라'
'항상 등뒤를 조심하라'
'일대일 전투 중인 상대의 뒤통수를 쳐라'
'일대일 대결은 허풍쟁이들이나 하는 바보같은 짓이다'
나의 강령은 비겁함이 아니었고 생존을 위한 전략이었다. 나는 매번 끝까지 살아남았고 힘센 녀석들은 약올라 했다. '만세'의 주인공은 언제나 나같은 약자들의 몫이었다. '만세!' 삼각형 꼭짓점에 발을 찍고 하늘을 향해 뛰어오르면 팀원들이 달려와 얼싸안았다. 그 순간, 세상은 내것이었다.
나의 전략은 규칙을 어긴 건 아니어서 놀이에서 배제되지 않았고 비겁하다고 놀리지도 않았다. 나같은 약삭빠른 아니, 잔머리 잘 쓰는 아니, 지혜로운 자들의 팀은 언제나 팀워크가 좋았다. 오늘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다. 내일이면 팀이 또 다르게 짜여질 것이었지만 우리는 그날 팀에 진심을 다했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억울해하고 힘싸움에 밀리고 있으면 달려가 적의 엉덩이를 걷어차 주었다.
이편도 저편도 들어가지 못하고 남은 한명 '깎두기'는 모두의 편이었고 약한 팀에게 부여되는 힘의 균형이었다. 그래야 게임이 공정했으니까, 그래야 놀이가 재미있어지니까. 방과후 운동장이나 동네 공터에서 매일 이러고 놀았다. 거칠지만 배려했고 어수선했지만 규칙은 철저히 지켜졌다.
금 밟아 놓고도 끝까지 우기는 어깃장쟁이는 놀이에 낄 수 없었다. 상대를 의도적으로 다치게 하는 심술쟁이를 피했다. 놀이에서 배제 되지 않으려면 규칙은 지켜져야 했고 배려해야 했다.
"야 너 금 밟았어, 아웃이야"
"아니야, 금 안 밟았어"
"이거 너 신발 자국 맞잖아"
우기기는 한번이면 족했다. 다음 판에 다시 들어가면 됐으니까. 놀이는 내일도 계속될 것이니까. 선(금:규칙)을 지키는 것이 게임을 지탱하는 기본 미덕이었다. 비디오 판독이 생긴 현대의 스포츠는 인정과 배려를 빼앗아갔다. 아이들의 생활은 놀이로 매일매일 리셋되었다. 놀이하는 아이들은 언제나 현재를 살았다. 우리 모두는 '호모 루덴스'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땐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 재미있는 게임은 누가 만들었을까? 규칙은 누가 정했을까? 심판이 없어도 게임은 잘 굴러갔다. 동네마다 규칙이 조금씩 달랐어도 이전 동네에서는 이랬다고 끝까지 고집하지 않았다. 바뀐 동네의 규칙에 금방 적응했다. 로마에 왔으니 로마법을 따르면 그뿐이었으니까.
사케르는 본래 어떤 범죄로 인해 사회에서 추방당한 자를 뜻한다. 호모 사케르는 아감벤에 따르면 절대적으로 죽일 수 있는 생명이다. 강제수용소의 유대인, 관타나모수용소의 포로들, 신분 증명 서류가 없는 사람들, 무법의 공간에서 추방을 기다리는 난민들, 산소 호습기에 묶인 채 간신히 연명만 하는 중환자질의 환자들이 아감벤이 말하는 호모 사케르다... 하지만 성과사회의 호모 사케르는 절대적으로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죽일 수 없는 존재라는 특성이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죽지 않는 자들이다. 여기서 사케르라는 단어는 '저주받은'이 아니라 '신성한'을 의미한다.
주인 스스로 노동하는 노예가 되는 노동사회를 낳는다. 스스로 한 사람이 동시에 포로이자 감독관이며 희생자이자 가해자라는 점에 있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이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 한병철 <피로 사회> 중에서
투명사회는 정확히 성과사회의 논리를 따른다. 투명한 고객은 오늘날의 새로운 수감자, 디지털 파놉티콘의 호모 사케르이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수감자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여기에 자유의 변증법이 있다. 자유는 곧 통제가 된다.
- 한병철 <투명 사회> 중에서
"얘들아, 오늘은 선생님이 어렸을 때 동네에서 하던 게임하나를 가르쳐 줄께. 이거 엄청 쟀밌는 게임이야. 이름은 '오징어 달구지'"
"이름이 왜 이렇게 촌스러워."
"오징어를 먹는다는 건가?"
"달구지는 또 뭐야!"
20년 전, 중학교 교사 시절 학급활동 시간에 아이들에게 오징어 달구지 게임을 가르쳐 준 적이 있었다. 게임의 규칙을 설명하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하다보면 규칙을 알게 되겠지하고 일단 편을 가르고 게임을 진행하기로 했다. 우리때도 하면서 규칙을 익혔으니까.
운동장에 동그라미, 세모, 네모를 크게 그리고 공격과 수비를 정했다. 공격하는 아이들이 바깥에서 활동하는 깽깽이발뛰기 자체를 어색해 했다. 깽깽 뛰다가 힘들면 잽싸게 반대발로 바꾸어 깽깽 뛰었다.
"선생님 쟤 반대발로 뛰었어요."
"아니야, 나 원래 이쪽 발이었어."
아이는 계속 우기면서 스스로 아웃되지 않았다.
두발 자유를 얻기 위해 '자유의 강'을 뛰어 건너도 수비는 멀뚱멀뚱 보고만 있었다. 건너가서도 계속 깽깽거리며 한발로 다니는 아이들이 있었고 안에서 힘싸움이 벌어졌을 때 금밟은 아이는 안 밟았다고 끝까지 우겼다. 바깥에서 '자유의 강'을 건너지 않은 상태에서 두발로 뛰어 다녔고 아웃이라는 말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 게임에 참여했다. 규칙이 지켜지지 않자, 나에게 호소하기 시작했다.
"OO이는 건너지도 않았는데 두 발로 막다녀요."
"쟤는 금 밟았는데 나가지도 않고 계속해요."
"선생님, 누가 뒤에서 발로 내 허리를 찼어요."
"OO이는 너무 심하게 해요."
모두 '자유'를 원했고 혼자 알아서 자유로워졌다. 방만한 자유 속에는 재미가 없었다. 현재 전세계인들이 열광하는 축구 경기도 영국에서 시작되던 초창기에는 무규칙에 가까운 경기였다고 한다. 상대 골대 안에 공을 넣기까지의 과정은 거의 전투에 가까웠을 것이다. 규칙이 사라진 게임은 유희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싸움일 뿐이었다. 나는 경찰이 되기도 했고 판사가 되기도 했다. 아웃시키자 억울해했고 나 이거 안 할래, 했다. 급기야 모든 아이들이 선생님 이 게임 재미없어요, 했다. 첫 시도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
규칙은 어렵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규칙을 무시했다. 더 강력한 처벌을 해 줄 수 있는 권력자를 기다렸다. 권력자가 통제 불능상태가 되자 게임은 재미가 없게 되고 멈췄다. 규칙이 지켜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고민했다. 내 어릴 때는 아무도 심판을 봐 주는 이가 없었음에도 규칙은 잘 지켜졌다. 규칙이 잘 지켜지니 게임이 재미있었다. 지금은 내가 게임의 권력자로 관여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일주일 후, 나는 한번더 오징어게임에 도전했다.
"얘들아 지난번에 했던 오징어 달구지 게임을 한번더 해보자. 이번에는 선생님은 심판으로도 팀원으로도 참여하지 않고 그냥 구경만 할께. 규칙은 이제 알테니까 너희들끼리 편을 짜고 게임을 한번 더 해봐."
반장과 체육부장이 편을 짜고 공격과 수비가 나누어 게임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뭔가 잘 돼가는 것 같았다. 발빠르게 움직이고 견제하고 위협하고 긴장감도 제법 흘렀다. 어수선한 틈을 타서 힘센 한 녀석이 깽깽이 발을 이발저발 바꾸어 가며 다녔다. 아이들이 너 아웃이라고 말했지만 녀석은 나가지 않았다. 아웃되어 나간다면 자신이 영원히 죽을 것 같이 완강하게 저항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그럼 나도 이렇게 다닐래하며 자유를 얻은 양 두발로 뛰어 다녔다. 금을 밟아도 나가지 않는 아이가 생격났다. 게임을 위한 몸싸움이 아닌 입싸움만 거칠어졌다. 욕설과 비방, 우기기가 난무했다.
엉망진창의 게임을 보는 것보다 나를 더 신경쓰이게 하는 게 있었다. 애초부터 게임에서 배재된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처음부터 게임에 참여할 의사도 없었고, 같이 하자고 말하는 아이도 없었다. 교실에서 따돌림을 받거나 외톨이 기질이 있는 아이도 아니었다. 몸쓰거나 과격한 놀이가 싫었을 수도 있고 정말 재미없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아이들은 게임에 배제된 아이에게 관심이 없었다.
놀이의 법과 규칙에서 배제된 아이들을 보았고, 추방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강력한 주권자를 기다리는 아이들을 보았다. 이제 우리는 순수했던 동심의 '호모 루덴스'의 시절로 돌아갈 길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아이들도 일찌감치 생존 게임에 몰려있었다. 교문 앞에서 기다리는 학원 승합차와 미니버스에 올라 모두 생존 게임의 '파놉티콘'으로 스스로 걸어들어 갔다.
사람은 믿을 만해서 믿는 게 아니야.
안 그러면 기댈 데가 없어 믿는 거지.
넌 여기서 나갈 이유가 있지만 난 없어.
주말 동안, '오징어게임' 9편을 모두 본다. 9월 중순 넷플릭스에서 개봉했으니 좀 늦은 감이 있다. 누군가는 호불호가 갈린다고 평가를 내렸지만, 대중문화의 질은 결과로 증명된다. 영화와 드라마의 중간 장르. 이젠 이 경계마저 모호해졌다. 잘 만든 드라마임에 틀림없다.
나는 '깐부'편이 좋다. 동네 마을을 세트로 두명이 구슬따먹기 게임을 하는 장면이 압권이다. 편일 거라 짐작하고 함께 했다가 적이 된 현실 속에 던져진 인간 군상들의 생존 본능이 뒤엉킨다. 좋아하는 이를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다는 딜레마의 용광로 속에서 절규한다. 반전에 반전을 억지스럽게 욱여넣지 않고 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치중한 점이 맘에 든다.
돈이 하나도 없는 사람과 돈이 너무 많은 사람의 공통점이 뭔 줄 아나? 사는 게 재미가 없다는 거야. 돈이 너무 많으면 아무리 뭘 사고 먹고 마셔도 결국 다 시시해져 버려.
'오징어 게임‘에서는 이미 '호모 사케르'의 존재로 몰락한 인간들이 게임 세트장으로 내몰린다. 게임 세트장은 벤담의 '파놉티콘'이고 아감벤의 '수용소'다. 세트장 천정 한가운데 돈다발이 적립되는 커다란 돼지 저금통이 자본주의의 민낯을 시원하게 까발린다. 인간 본질과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에 대해 진지하게 탐색한 철학적 대사들과 미장센이 녹록치 않다.
돈의 역사는 오래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로도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 이후의 시대를 상상한다. 돈의 시대와 함께 인간세는 사라져 버릴까? 아마도 인간세보다 돈의 시대는 먼지만큼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일 것이다. 돈 말고 무엇이 인간 욕망을 대체하게 될까? 인간은 다른 길을 찾아낼까? '기댈 데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믿을 수밖에 없는' 귀결이 아니라 유희적 인간 본성을 회복하기 위한 스스로의 선택이길 소망한다.